초판본 구상 시선
신간 시집, <<초판본 구상 시선>>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오늘
<<초판본 구상 시선>>을 엮고 해설한 오태호는 구상의 시가 “인식은 종교적 문답과 철학적 형이상학에 기대” 있지만 바탕에는 “월남민의 자의식”과 “초토화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의 지향 대상을 현실에서 갖지 못한 존재가 답을 하느님에게 물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한국 시인으로는 드물게 끝까지 형이상학을 놓지 않았던 시인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건너편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구상은 누구인가?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1938년 원산 근교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 수료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 1941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2~1945년 ≪북선매일신문≫의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46년 북한 원산에서 시집 ≪응향≫ 필화 사건을 겪은 뒤 월남한다. 20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교수 생활도 했다.
시는 어떤가?
1951년 첫 시집 ≪구상≫을 내고 1956년에 ≪초토의 시≫를 출간한 뒤 말년까지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은 기독교적 명상시를 썼다.
그의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 책에 실린 <그리스도 폴의 강·43>에는 가을 강을 바라보며 분단 시대의 월남민으로서 남한에 정착해 살아온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한 ‘특별한 눈’이 나타난다.
시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어떤 것이었나?
자신을 배웅하던 어머니의 애절한 눈,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곧 조금 초월해 사는 것”이라며 채근담 구절을 짚어 주던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 감옥에서 순교했을 신부 형의 어진 껌벅 눈, 첫 그리움이던 러시안의 피가 섞인 동경 하숙집 유미 짱의 보랏빛 눈, 북간도로 떠난 외사촌 누나의 붉어진 실눈 등이 있고, 서양 수녀와 일본 헌병과 이중섭과 공초 선생 등의 눈이, 시인에게는 ‘잊히지 않는 눈’으로 기억되면서 가을 강물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뭔가?
영원한 오늘을 응시하는 형이상학적 도정이다.
어떤 배경이 있는가?
낭만주의적 자의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의식의 두 축이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쟁투를 벌이는 분단과 전쟁의 파국 앞에서 폐허적 현실을 명징하게 묘파하려 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난 연작시가 바로 1950년대 한국전쟁의 시공간을 형상화한 <초토의 시> 연작이다.
그때 그에게 현실은 모두 사라졌는가?
초토화된 대지를 어떻게 시로 육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그의 시의 출발점이다. <밭 일기> 연작에서는 대자연에 대한 외경심으로 이어지고, <그리스도 폴의 강> 연작에서는 강을 배경으로 성찰적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
연작의 문제의식은?
초토로서의 대지, 대자연으로서의 밭, 한반도의 젖줄로서의 한강이 시에 나타난다. 시대적·대지적·역사적·상징적 자연물이다. 문제의식은 자아와 세계, 역사와 자연, 영원과 오늘, 세속과 초월, 곧 이항대립의 내적 통일성이다.
단편시는 어떤가?
순수성과 영원성을 지향하는 시인의 욕망이 드러난다. 그것은 때로 시와 말씀에 대한 사색으로, 때로는 순수에 대한 동경으로,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향으로, 임종에 이른 고백으로 빚어진다.
그가 도달한 지점은?
그리하여 시인은 영원한 오늘을 응시한 구도자적 시인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한다.
그는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분단 국가에서 언론인, 교육인, 신앙인으로 살았다. 가시적 현실 세계 너머에 자리한 궁극적 실체가 궁금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지향은 순수성과 영원성, 현재성을 응시하는 철학적 사색을 강제한다.
어떤 시를 골랐나?
예술적 형상력을 중심으로 초기작, 중기작, 후기작을 골고루 배치했다. 연작시의 대명사인 <초토의 시>는 전 작품을 실었다.
오늘 우리에게 구상은 뭔가?
좌우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쟁투 속에서도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상생을 시적으로 추구한 시인이다. ‘오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구도자적 모더니스트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독자에게 한 편을 추천한다면?
<오늘>이다.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초판본 구상 시선≫, 구상 지음, 오태호 엮음, 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