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천줄읽기
소설 천줄읽기 신간, ≪백치≫
그 위대한 작품의 결코 적지 않은 10%
≪백치≫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김정아가 발췌한 분량이 지만지 판으로 318쪽이므로 한국어로 완역했다면 3000쪽이 넘는 셈이다. 문학을 발췌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완성도는 어디까지 재현될 수 있을까? 작가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거의 모두 등장한다는 이 대작을 골라 옮긴 김정아에게 작품과 작가와 번역과 발췌에 대해 묻는다.
10% 발췌다. 완역과의 차이는?
내가 지식을만드는지식의 발췌본 시리즈를 열심히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맛보기다. 마트에 가면 커다란 팩으로 포장된 식료품을 보게 된다. 아무리 맛나 보여도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선뜻 사지 못한다. 머뭇거릴 때 아주머니가 맛보기를 건네준다. 부담 없이 맛을 보고 맛있으면, 커다란 팩을 카트에 넣는다.
지금 소설 얘기를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은 그 두께만으로 일반 독자뿐 아니라 연구자들까지 기겁하게 만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러시아 문학박사인 동료들이나 선후배 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을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얇고 예쁜 지만지의 발췌본들이 맛난 맛보기가 되어 거대한 완역본 앞으로 독자들을 안내할 수 있다면, 발췌본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다.
≪백치≫는 어떻게 발췌했나?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으면서도 주요 테마들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을 골라냈다.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모든 주요 테마를 이 작품에 다 쏟아 넣으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들을 연결하고,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치는 누구인가?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이 실제 앓고 있는 간질을 동반한 일종의 병명이며, 더 나아가 그의 별명이자 아이덴티티다. 미시킨 공작을 뜻한다.
그는 왜 백치인가?
주인공 미시킨의 모델로 그리스도, 유로디비이, 그리고 돈키호테가 상정된다. 작가는 미시킨 공작을 그리스도적이고 돈키호테적인 유로디비이 백치라고 정의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셋 모두 정신적으로 완벽하리만큼 순수하고 성실하며 진실하나 당대 사회 코드와 맞지 않았다.
예수가 그랬나?
성경 속의 예수는 인류가 생긴 이래 유일하게 기억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는 가장 흉폭한 죄인으로 여겨졌다.
돈키호테는 뭔가?
돈키호테는 완벽한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기사도 정신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시대에는 광인이자 어릿광대로 취급된다.
유로디비이는?
유로디비이는 러시아에서 ‘거룩한 바보들’로 통했다. 일반적인 사회 규칙이나 사회 구성원 간의 암묵적인 약속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을 위한 광인으로 취급되었다.
사회 부적응자들 아닌가?
사회는 그들의 순수함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하지 못하다. 작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이 사실을 말한다. 작품 속에서 사람들이 미시킨을 백치라고 수군거리고 모욕할 때, 그것은 그 사회의 불순함과 오염됨을 보여 주는 반증이 된다.
백치는 긍정을 뜻하는가?
세상을 구원하러 온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 예수를 극악한 죄인이라 부른 사회, 그리스도의 재현인 완벽한 정신적 아름다움의 소유자 미시킨을 백치라고 부르는 사회에 우리는 산다.
도스토옙스키의 알레고리는?
그는 미시킨 공작을 백치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돈, 권력, 성적 타락 등이 만연한 황금 송아지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긍정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백치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그가 자리할 곳은 정신병원밖에 없다는 참으로 무섭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의 메시지는?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을 그려 내려 했으며, 이 인물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보여 주었는가?
“긍정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을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미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명제의 성공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명제의 실패는 명제의 성공보다도 플롯에 있어서나 테마를 위해서나 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세계, 구원의 빛마저도 파괴하는 세계에 대한 경종을 이보다 잘 보여 줄 수 있을까?
백치는 작가의 다른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젊은 날 서구 사상에 물들어 급진적인 서클 활동에 연루되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을 경험한다. 이때 사상의 180도 변화를 겪고 극단주의적인 슬라브주의자가 된다. 그 후 작가의 대작들은 서구주의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슬라브주의자의 대 서구주의 투쟁사가 궁금하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서구 사상인 공리주의, 푸리에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초인임을 증명하려고 살인을 감행한다.
이제 두 번째 대작인 ≪백치≫에서는 주인공인 백치 미시킨 공작을 제외한 사회 전체가 서구적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작품 사이에 어떤 발전이 있는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리스도적 사랑을 실천하는 소냐라는 인물을 만나 부활을 하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나, ≪백치≫에서는 소냐의 계보를 잇는 그리스도적 인물 미시킨조차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파멸한다. 희망도 없고, 희망에 대한 약속이나 기대도 없다. 시베리아에서 갓 돌아왔을 때 러시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작가의 희망은 점점 시들고, 러시아적 정신을 좀먹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서구 사상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 간다.
≪백치≫에서 ≪악령≫으로의 이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서구 사상의 해악에 대한 작가의 공포는 ≪백치≫를 잇는 세 번째 대작 ≪악령≫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죄와 벌≫과 ≪백치≫의 공간 배경은 서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도시 페테르부르크였다. ≪악령≫은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음모, 폭력, 강간, 방화, 자살, 살인을 다룬다. 이제 서구주의의 악영향은 대도시 페테르부르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악령’은 서구사상에 물든 사람들, 곧 누가복음 8장 32절에서 36절에 등장하는 악령, 귀신을 말한다. 악령에 씐 돼지들이 비탈을 내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었던 것처럼, 악령에 물든 당시 사회도 자멸과 파멸로 피비린내를 풍긴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 중 가장 폭력적이다. 이 작품에는 희망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희망’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악령≫의 다음 작품이자 작가가 인생의 끝에서 쓴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다. 소냐와 미시킨의 계보를 잇는 그리스도적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알료샤 카라마조프와 그를 따르는 12명의 아이들을 통해 러시아 민중의 가슴속에 있는 믿음의 부활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예고된다.
번역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
천재의 언어는 그 자체로 상징적이며 풍부하고 아름답고 충만하다. 때로는 시처럼, 모양과 울림마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을 원어가 가진 힘 그대로 옮기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전체적인 테마와 상징의 문맥 속에서 곱씹고 또 곱씹어서, 최대한 가깝게 한글로 옮겨 내고 싶었다.
독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독자 여러분, 도스토옙스키가 어렵다고 지레 겁먹지 말고, 지만지의 발췌본을 맛보기 삼아, ‘한 번만 읽어 보세요’. 그러면 독자 여러분도 저처럼, 도스토옙스키의 매력(마력!)에 빠져들어, 작가의 완역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정아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이다.
“작년에 제가 만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상하다는 것은, 실제로 그런 우연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아주 드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에 끌려 나가 정치범이라는 죄명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0여 분 후, 특사가 내려져서 감형이 되어 사형 대신 좀 가벼운 다른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두 개의 다른 선고 사이에 보냈던 20분, 아니 적어도 15분간을 몇 분만 있으면 자기가 갑자기 죽어 버리게 된다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 아래에서 지내야 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은 가끔 당시 자기가 받았던 인상들을 회상하곤 했는데,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처음서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해 캐묻곤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몇 분간의 일들을 하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곤 했습니다. 구경꾼들과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처형대에서 약 스무 걸음쯤 되는 곳에 세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답니다. 처형될 죄수가 몇 명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세 명의 죄수들을 기둥으로 끌고 가서 묶었습니다. 그들에게 사형복(길고 헐렁한 흰 옷)을 입힌 후, 총이 보이지 않게끔 끝이 뾰족한 흰 두건을 눈 위까지 눌러 씌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각의 기둥 앞에 몇 명씩의 병사들이 정렬했습니다. 제가 아는 이 사람은 순서상 여덟 번째였으니, 두 차례의 형이 집행된 후, 세 번째 형 집행에 기둥으로 가야 했습니다.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모든 사형수 앞을 돌아다녔습니다. 드디어 목숨이 붙어 있는 것도 5분밖에는 안 남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이 5분이 끝없이 영원한 시간이자, 엄청난 보물이나 되는 듯이 중히 여겨지더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이 5분 동안 최후의 순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주 충실한 삶을 살아 낼 수 있을 듯이 여겨졌고, 그래서 그동안에 처리할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을 할애하고, 또 다른 2분은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쓰고, 나머지 1분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는 데 할당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일을 결정한 그대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7세의 건강하고 강한 청년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들 중 하나에게 아주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심지어 그 대답에 흥미를 느끼기조차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동료들과의 작별 인사가 끝난 후에,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할당한 2분의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에 대해 생각할지 미리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하지만 3분 후에는 이미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즉 누군가 다른 인간 아니면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서? 이런 모든 문제들을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명확하게 상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2분 안에 해결하려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금빛 지붕을 한 사원의 꼭대기가 강렬한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서우리만치 고집스레 그 지붕과 지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태양의 광선을 바라보면서 그 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그에게는 이 광선이야말로 3분 후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이 융합하게 될, 자신의 새로운 자연인 듯이 여겨지더랍니다…. 이제 곧 닥쳐오게 될 미지의 세계와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혐오감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순간에 무엇보다도 그를 견디기 힘들게 했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이었답니다. 그 생각이란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이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무한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이 몽땅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1분 1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분 1초를 정확히 계산해 한순간도 헛되이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 등이었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마침내는 증오감으로 변질되어, 한시라도 빨리 총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변하더라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를 마친 미시킨 공작은, 앞서 문간방에서 하인에게 했던 리옹의 사형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이야기의 끝에, 그림의 테마를 골라 달라고 부탁했던 아델라이다에게 기요틴이 내려오기 1분 전의 사형수의 얼굴, 단두대 위에 서서 받침대 위에 막 목을 갖다 누이려는 사형수의 얼굴을 그려 보라고 제안한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만, 목이 떨어져 나간 다음에도 어쩌면 한 1초간은 자기 목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할까요! 만약 그것이 5초 동안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단두대로 올라가는 맨 위의 한 계단만 선명하고 가깝게 보이도록 그렇게 단두대를 그려 보세요. 죄수는 단두대 위에 서 있고,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습니다. 신부가 십자가를 내밀자 그것을 향해 파랗게 질린 입술을 게걸스레 내밀고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머리, 이것이 그림의 주요소입니다. 성직자나, 형리, 그리고 형리의 두 조수의 얼굴과 아래쪽에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와 눈 등은 마치 안개에 싸여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부차적으로 뒤쪽에 그려 넣으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림의 전부입니다.”
≪백치 천줄읽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103~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