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시조집
한국 시 신간, ≪초판본 가람 시조집≫
조오다 선뜻 깨니
시조를 흘러간 왕조의 노래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조선의 궤멸 이후 익숙했던 모든 것이 배척되었지만 전통에서 비롯된 새로움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가람 이병기는 조선 지식인의 통찰과 직관을 사용해 자연과 인간, 물질과 인식이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가 조선인의 마음보다 눈앞의 난 한 촉을 더 오래 바라본 까닭이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蘭草 (一)
한 손에 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든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蘭草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그는 왜 시조를 썼을까?
당대에 시조 부흥이 번성했다. 가람도 그런 분위기 안에 있었다.
시조 부흥이라니?
1920년대 이슈가 시조 부흥론이었다.
무슨 얘긴가?
식민지 현실에서 가장 전통적인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를 내세웠다.
목적은?
민족 동일성을 보존하고 전승하고 창조하려는 문화 운동이었다.
왜 시조였을까?
새로운 문화를 모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적인 것을 탐구하고 재현해 유산을 복권시키는 일이 필수불가결했다.
가람 시조의 특징은?
실감실정이 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현실 경험과 정감의 도입, 적절한 표현방식 개발을 강조했다.
육당과 비교하면?
최남선이 정형시를 강조했다면 가람은 근대 서정시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방법론은?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조를 생각했다.
시조가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노래가 아니라 문학이었다.
근대의 혁명인가?
고시조가 노래의 리듬에 묶인 형식이라면 근대 시조는 리듬에 선행하는 언어 표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가람의 시조 미학은?
옛시조에 만연한 상투적 정서의 표현을 버렸다. 구체적 방편은 취재 범위의 확장, 격조의 변화, 연작 쓰기로 나타난다.
성공했나?
시조를 조선인의 자연스런 사상과 감정을 담은 근대적 문학 장르로 만들어 냈다.
조선심과 같은 얘긴가?
아니다. 당대의 경향은 시조를 단일민족 신화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인 심성의 본질, 곧 조선심 안에 가두려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가람 시조집≫을 참조하라.
내용이 뭔가?
그의 첫 번째 시조집이다. 제재별 5장으로 묶었다. 명승지 기행, 화초와 식물의 세계, 개인사의 기억과 과거, 향토에 대한 회고와 죽음에 대한 사유, 시간의 순환과 사물이다. 자연과의 교감이 바탕을 이루는데 자연을 노래한 시조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에게 자연은 뭔가?
객관적 대상이나 도구화된 사물이 아니었다. 자연물은 그 자체로 깨달음과 위로를 주는 존재다.
자연을 어떻게 만났는가?
동양적인 자연관, 오도의 세계로 만난다. 이것이 가람 시 특유의 정신주의를 형성한다.
오도, 곧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은 무엇인가?
신석정의 ≪가람 시조집≫ 평이 있다. 그는 가람에 대해 동양적인 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오도와 관조의 세계, 섬세한 언어 감각을 통해 한국적 리리시즘을 재현했다고 말했다.
어디서 나타나는가?
난초 연작에서 오도의 정신이 강렬하게 표출된다.
난초라니?
가람과 난초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양주동은 ‘난초는 가람인가’라 했고 김윤식도 난초의 기품 자체가 가람 시조의 격조를 형성한다고 분석했다.
왜 난초였을까?
난의 생리는 혼탁한 세속과 물질적 욕심을 벗어난 고결한 정신적 가치를 집약해서 보여 준다.
가람은?
난초의 기품은 세속의 가치가 지니지 못한 자연의 섭리이며 물질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가람의 정신주의를 표상한다.
그의 문학사적 의미는?
전통의 현대화, 고전과 조선적인 것의 문학적 심미화다.
작품은?
시조를 민족 동일성 담론에 갇힌 유산에 한정하지 않고 현재에 살아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의 가능성으로 열어 놓았다.
생애는 어떠했나?
1891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해 유교적인 가풍에서 자랐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몇몇 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 동국대, 국민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뇌일혈로 쓰러져 투병하다 1968년 고향 수우재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권채린이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2005년에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했다.
가람의 시 한 수를 부탁한다.
역시 난초다.
蘭草 (一)
한 손에 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든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蘭草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蘭草 (二)
새로 난 蘭草 닢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참아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츰 볕이 발 틈에 비쳐 들고
蘭草 향긔는 물미듯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을 두고 참아 어찌 뜨리아
蘭草 (三)
오날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든 蘭草 다시 한 대 피어나며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저기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어 冊을 앞에 놓아두고
張張히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蘭草 (四)
빼어난 가는 닢새 굳은 듯 보드릅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微塵도 가까히 않고 雨露 받어 사느니라
≪초판본 가람 시조집≫, <난초> 연작, 이병기 지음, 권채린 엮음, 2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