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명 시선 초판본
한국 시 신간, <<초판본 김동명 시선>>
몸뚱이 없는 사내들
그래도 입과 머리는 빠르게 움직인다. 삼심육년 만에 다시 맞는 설날, 색동저고리가 부끄럽지 않은 날, 교무실 난롯가에 교사들이 둘러앉아 청요리에 배갈 몇 잔을 비운다. 고담준론과 비분강개, 그러고는 다시 주인을 찾아온 조국과 민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찾았어야 했는데, 뺏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설날
敎務室
스토부를 삥 둘러
입은 살었으나 주먹은 보잘것없는 위인들이다.
밖앝은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날시나
마음 하늘의 低氣壓은 무쇠같이 무거운 친구들이다.
알미늄
주전자에 김도 채 오르기 전에
벌서 도도해 오는 醉興을 어쩌지 못하는 酒豪들이다.
이윽고
입은 噴火口같이 터지나
복도를 지나는 사환 아이의 발자최 소리에도 흠칫하는 겁쟁이들이다.
머리와
입만 남어 있는 몸뚱이 없는 사내들
“過歲 安寧하시오.”
오늘은.
일즉이 색동조고리를 입고 만나 본 일이 있는,
그리고 三十六年만에 다시 만난 우리의 설날이다.
≪초판본 김동명 시선≫, 김동명 지음, 장은영 엮음, 49~50쪽.
당신은 왜 이 시를 골랐나?
해방 후 맞이한 설날 교무실의 풍경이다. 말만 앞세우는 위선적인 교사들의 모습은 당시 사회상에 대한 김동명의 신랄한 태도를 보여 준다. 피상적인 현실 인식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그의 세계관이 보인다.
김동명은 누구인가?
한국 시사에서 가장 유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은유의 주인공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가 그의 시 <내 마음은>의 첫 행이다.
전원적, 목가적 시인인가?
그의 시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순수 서정시부터 현실과 정치 그리고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은 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시인이자 교육자였지만 정치가의 삶도 살았다. 현실 참여 의지가 문학에 대한 열정 못지않았다.
그에게 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1920년대 문단의 감상적, 퇴폐적 경향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감동은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이라는 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문단 활동의 시작이었다.
당대 문단의 평가는?
백철이 1949년 ≪朝鮮新文學思潮史≫에서 그를 “전원파에 속하는 서정시인”이라 했다. 조연현은 1980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소박한 감성과 목가적인 서정이 그 주조”를 이룬다고 했다.
타당한 것인가?
이러한 평가는 1920∼1930년대, 김동명 시의 전반부에만 해당한다. 이후에는 현실 지향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는 현실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시 <현실(現實)>에서 눈물을 좋아하는 ‘괴물’, ‘고약한 즘생’, ‘야릇한 즘생’과 같다고 표현한다. 인간 앞에 놓인 이 현실은 때론 괴롭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런 현실 속의 인간은 무엇인가?
현실이 괴롭다고 해서 이를 외면할 수도, 쉽게 타협할 수도 없는 불안한 존재다.
그 불안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시 <내 마음은>에서 현실 속의 자신의 마음을 ‘호수’, ‘촉(燭)불’, ‘나그네’, ‘낙엽’에 비유했다.
김동명의 메시지는?
그는 자기 내면과 현실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한다. 한 인간이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버티고 서서 삶의 진실을 구하려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가 아닐까.
시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목격자(目擊者)>와 같은 작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한국전쟁 당시 포성이 울리는 긴박한 상황에서 피난 행렬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을 예로 든다.
‘풀·스피드’로 달리는 自動車·自動車·自動車·自動車……
百千 瀑布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아홉 時−열 時−열한 時−열두 時−한 時−한 時 半−
밤이 깊어 갈수록 自動車의 奔流는 더욱 凄烈하다
누가 人道橋 車道를 요 꼴로 設計하였더뇨
달리는 마음의 焦燥로움이 눈에 겨웁다
아모러나 ‘歷史’는 드디어 無事히 避難하지 않었느냐
요행 한가람은 밤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는 窓門을 활짝 열어젖히고
傲然히 앉어 바라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화자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는 육체적 고통이나 상황의 긴박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죄어 오는 현실과 대결하듯이 상황을 목도한다. 이 화자는 김동명 자신이기도 하다. 현실이 괴물이라면 자신은 맞서 싸우거나 회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현실을 그저 응시만 하나?
그것이 진실을 구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태도다. 그에게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펼쳐지는 현실 세계는 영원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나?
시 세계에서는 순수한 서정의 공간과 세속적 현실의 공간이 교차한다. 그의 현실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상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 욕망, 서로 다른 이 두 세계가 길항하는 장소다.
김동명 시의 독해법은?
당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한 시인의 시선에 담긴 갈등과 회한,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애착을 공감해 보라.
당신은 누구인가?
장은영이다. 경희대학교에서 박사를 마치고 현재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