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자빈 시선
러시아 시, 18세기 송시 신간 <<데르자빈 시선>>
우비 순트, 브레비타스 비타이
러시아 시의 아버지라는 18세기 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은 묻는다. 그대 지금 어디 있는가? 인생은 한바탕 짧은 꿈인가? 그가 애창했던 다섯 가지 토포이, 곧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우비 순트, 브레비타스 비타이, 바니타스는 죽음을 통해 삶의 광채를 드러낸다.
무상
시간의 강은 흘러
인간의 모든 것을 가져가고
사람도 왕도 왕궁도
망각의 심연 속에 빠뜨린다.
리라와 나팔 소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영원의 입 속에 삼켜질 테고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데르자빈 시선≫, 가브릴라 데르자빈 지음, 조주관 옮김, 7쪽
이 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은 시간 앞에 선 운명의 공동체다. 아무도 시간을 피할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이 시에는 인생무상이라는 철학적 테마가 침윤해 있다. 물의 흐름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데르자빈은 누구인가?
18세기 말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정말 ‘러시아 시의 아버지’인가?
러시아에서는 그를 그렇게 부른다.
어떻게 살았나?
가난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좋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군에 입대해 푸가초프 반란 토벌군으로 공을 세웠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총신이 되었으며, 당대의 위대한 계관시인으로서 영광을 누렸다. 아나크레온풍의 시를 주로 썼다.
아나크레온풍 시란?
아나크레온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시인이다.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을 찬양하는 송시(頌詩)를 썼다. 그의 시풍을 아나크레온풍 시라고 한다. 데르자빈의 대표적인 장르다.
데르자빈의 송시는?
18세기 후반 송시의 전범이 되었다. 시적 영감이 풍부하고 인간의 열정과 감정을 노래했다. 그전의 송시는 장엄하고 애국적이며 단순 명료했다.
주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통치계급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감을 강조했다.
사상 배경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입장을 따른다. 시인에게 철학이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다. 그들에게 쾌락은 육체가 아니라 아타락시아, 즉 마음의 평정, 무욕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고전주의 작가인가?
러시아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18세기 전체를 고전주의 시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분석해 보면 바로크적 요소와 고전주의 요소가 혼재해 있다.
바로크란?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가 강조되는 고전주의 예술에 우연과 자유분방, 때로는 기괴한 양상까지 섞어 넣은 결과로 생긴 예술양식을 말한다. 단순한 자유분방이 아니고, 최소한의 질서와 논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강한 힘이 느껴진다.
러시아에서 바로크는 어떤 역할을 했나?
문학이 새로운 테마, 소재, 묘사 방법을 찾도록 했다.
그의 바로크는 무엇인가?
토포이(topoi)를 알아야 한다. 문학 용어로 ‘판에 박힌 표현’, 또는 ‘진부한 주제나 상투적인 문구’라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포이를 웅변가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법으로 간주했다. 오늘날 토포이란 ‘설득을 위한 예술’이나 ‘설득의 미학’을 위한 예술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토포이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비 순트(Ubi sunt), 브레비타스 비타이(Brevitas vitae), 바니타스(Vanitas)다.
카르페 디엠이란?
‘현재를 즐겨라’ 또는 ‘오늘을 잡아라’는 뜻의 라틴어다.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유래했다. 데르자빈의 아나크레온풍 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 지상에서 시간을 살면서 후회 없는 순수한 쾌락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무엇인가?
개인주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다. 사회에 대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모두 수행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저녁초대>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 잘 나타나 있다. “지고한 행복은 보라색 광선에 있지 않고,/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강과 영혼의 평화에 있는/ 최고의 축제는 중용이다.”
메멘토 모리란?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카르페 디엠’이 주로 지상의 문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담론의 토포이라면, ‘메멘토 모리’는 천상의 문법을 중시하는 신앙인들의 항상적인 토포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통찰한 죽음은 어떤 것인가?
첫째 위협으로서 죽음이다. 죽음은 항상 도둑처럼 다가온다. 둘째 계몽으로서 죽음이다. 시인은 인간에게 미리 죽음을 가르친다.
죽음과 쾌락의 관계는?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은 사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염두에 둔 말이다. 카르페 디엠은 다가올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세속적 선택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비순트는 뭔가?
‘어디 있는가?’라는 뜻의 라틴어다. 중세 라틴어 시에 크게 번졌던 토포이다.
시에서 어떻게 등장하는가?
추도시나 만가, 또는 송시에 주로 등장한다. 가고 없는 사람들, 주로 영웅, 유명한 귀족, 그리고 미인의 이름을 열거해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의 속절없음을 나타낸다.
브레비타스 비타이와 바니타스도 허무함에 대한 모티프인가?
‘브레비타스 비타이’는 ‘인생은 짧다’, ‘인생은 꿈이다’는 뜻이다. 꿈같은 삶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덧없음을 말한다. ‘바니타스’는 ‘무상, 공허, 덧없음, 그리고 허무함’을 의미한다. 역시 시간과 공간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헛됨을 지적한 말이다.
토포이의 메시지는?
인생이란 한없이 짧고 무상한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는 것이다.
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희망>의 한 구절을 보자. “영원의 문지방에 서서/ 나는 삶과 공허를 사랑한다”. 삶이 공허하다고 해도, 시인은 희망을 잃지 말 것을 권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끌려다니는 희생물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다. 희망은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보물,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이다. 시인은 “희망의 소리−신의 목소리”로 생각하고, 죽음의 시간에도 헛되지만 미소 지을 것이라 말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로 전승되면서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게 만든다. 러시아 시의 황금시대와 은시대를 예고해 준 미적 계몽주의자라 할 수 있다.
어떤 평가를 받았나?
구콥스키는 러시아 고전주의의 상속자일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의 기초자로 평가했다. 세르만은 계몽주의 시인이며 18세기 미학과 철학의 발견자로 간주했다. 클로드 바크비스와 치젭스키는 바로크의 장식적 스타일의 대가로 평가했다. 유리 로트만은 데르자빈 시학의 특성인 과감성을 금지의 파기에서 찾는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행복이란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무욕의 상태에서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누군가?
조주관이다.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다. 한국 러시아문학회 회장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학술 위원을 지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데르자빈을 소개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알려진 러시아 시인은 몇몇 유명 시인뿐이다. 특히 18세기 러시아 시인은 소개조차 되지 않았다. 데르자빈의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감상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