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조 사선
중국 문학, 송사 신간 <<이청조 사선>>
안개 엷고 구름 짙은 시름 가득한 긴 오후에
날은 암담하고 시간은 더디 간다. 좋은 시절 돌아왔으나 옆은 싸늘하다. 향로의 연기는 내 마음 수심 같이 끊길 줄 모른다. 술 한잔 들고 국화를 바라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여윈 모습이 문득 내가 아닌가. 임은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은 임을 부른다.
취화음(醉花陰)
안개 엷고 구름 짙은 시름 가득한 긴 오후,
서뇌 향을 금수 화로에 사른다.
좋은 시절 다시 중양절 되었는데
옥베개 비단 휘장 꾸민 방 안
한밤중까지 냉기가 스며든다.
동쪽 울타리에서 술 마시며 황혼 녘 지내고 나니
암향 퍼져 와 소매를 채운다.
영혼 다 스러지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주렴 걷고 서풍 맞는데
사람은 국화보다 야위어 있다.
薄霧濃雲愁永晝,
瑞腦消金獸.
佳節又重陽,
玉枕紗廚,
半夜凉初透.
東籬把酒黃昏後,
有暗香盈袖.
莫道不銷魂,
簾卷西風,
人比黃花瘦.
≪이청조 사선≫, 이청조 지음, 이지운 옮김, 56∼57쪽.
이청조 사 가운데 왜 이 작품을 골랐나?
작품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고, 이별의 수심을 아름답게 표현해 사의 본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남편 조명성(趙明誠)이 이 사를 보고 사흘 동안 사를 50수 썼다. 여기에 이청조 작품을 섞어 친구 육덕부(陸德夫)에게 평을 청했다. 육덕부는 단번에 이청조의 것을 집어 들고 절묘한 작품이라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조명성은 그 사가 부인의 것임을 이실직고하고 이청조의 재능에 새삼 감탄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인가?
암담한 날씨와 더디 가기만 하는 시간은 수심에 찬 화자를 암시하며, 향로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는 끊이지 않는 그리움을 표현한다. 좋은 시절이 돌아왔지만 남편은 출타 중이라 규방은 싸늘하기만 하다. 결국 작가는 홀로 술을 마시며 국화를 감상하다가, 문득 자신이 국화보다 더 초췌함을 깨닫고는 외로움을 절절히 느낀다. 마지막 글자인 ‘수(瘦)’, 곧 야윈 이유는 첫째 구의 ‘수(愁)’ 즉 근심 때문이었고, 또 근심 때문에 야윌 수밖에 없으니 감정이 끊임없이 순환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운이 길어져 작가가 말하려던 아련한 그리움까지 느끼게 된다.
사란 무엇인가?
운문의 일종이다. 당나라 중기에 발생해 송대에 가장 번성했다. 수당 시대에 유행했던 자극적이고 신선한 음악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시와는 어떻게 다른가?
첫째,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락에 맞춰서 불렀기 때문에 운율이나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둘째, 제목이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다. 사는 정해진 곡조에 맞춰서 짓는데, 이 곡조 이름을 제목으로 쓰기 때문이다.
셋째, 시가 뜻을 펴내는 것이라면 사는 정감을 쏟아 내는 것이다. 시는 장엄하고 정치적, 윤리적인 내용이 많은 반면, 사는 서정적이고 개인적, 염정적인 내용이 많다.
송대에 사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에서 유희와 가무가 성행하자 그 가사인 사도 유행했다. 역대 제왕과 문인들이 사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한 것도 이유가 되었다.
당대에 심하게 폄훼된 이유는?
‘앉아서는 경전이나 역사서를 읽고 누워서는 소설을 읽으며 뒷간에서는 사를 읽는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뒷간에서나 읽을 정도인가?
시나 경전이 엄숙하고 관조적인 미학을 추구했다면, 사는 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감정을 진솔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담아냈다. 이런 짙은 유희성 때문에 천박하다고 여겼다.
천박했다면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역설적이지만 그 점이 오히려 사가 지닌 문학적 가치다. 다른 장르보다 훨씬 자유롭게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것, 그것을 아름다우면서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것 말이다.
이청조는 누구인가?
중국 문학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목받았던 여성 문인이다.
어떤 작품을 썼나?
시, 사, 문학비평, 금석 고증 등 다양한 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어떤 개성을 드러냈나?
대부분이 개인적인 감정, 특히 연정을 노래한 데 비해 이청조는 망국의 한과 국가 흥망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내용 역시 굴곡진 인생이 녹아들어 평화와 안정, 혹독함과 비참함이 풍부히 담겨 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금나라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남송이 건국되었다. 백성들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했지만 남송 정권은 국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향락을 즐기는 풍조가 성행했다.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북송이 망하기 전까지는 학자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았기에 사풍이 낭만적이고 청신했다. 그러나 전란 후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으면서 후반기에는 사풍도 슬프고 비참하게 변해 규원사(閨怨詞)를 주로 썼다. 남송 조정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비평하며 사회와 사대부의 부패에 대해 비분을 표시하는 애국사도 많다.
규원사란?
여성의 입장에서 이별의 슬픔과 원망, 그리움을 노래한 사다.
이청조가 특히 규원사를 많이 남긴 이유는?
금실이 좋았던 남편을 병으로 잃고, 나라도 망해 타향을 떠도는 아픔을 겪었다.
문체의 특징은?
이안체(易安體)라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독특하고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구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문학사에서 위치는?
완약사(婉約詞)의 종주로 꼽힌다.
완약사란 무엇인가?
사의 유파중 하나다. 수사가 완곡하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표현이 특징이다. 주로 여인의 연정, 이별의 슬픔을 함축적인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대표적인 작가는 이청조와 유영(柳永)이다.
후인의 평가는?
청대의 사 비평가였던 진정작(陳廷焯)은 “이청조는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원류는 진관, 주방언으로부터 나왔으나 어휘를 구사하는 데는 대단히 창조적인 면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이청조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천 년 전 작품이다.
그때 작가는 시대의 혼란과 개인적 어려움을 거치면서도 우아함과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삶과 문학은 어려움에 직면한 인간이 이를 얼마나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작품 자체의 아름다운 수사와 풍격, 깊이 있는 내용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험난했던 인생 역정에서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화시켰는가를 관찰하는 것도 작품을 읽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
이지운이다. 전통 시기 여성 작가를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