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열매
지식을만드는지식 세계 희곡 문학 선집, 러시아 희곡 신간 <<계몽의 열매(Плоды просвещения)>>
가장 가망 없는 사람들
톨스토이는 희곡도 썼다. 이 작품에는 지주와 농민과 하인이 등장한다. 셋 가운데 가장 가망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은 하인이다. 지주처럼 생각하지만 지주가 될 수 없고 농민처럼 살지만 농민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에게 남은 선택은 부패뿐이다. 존재와 의식이 서로를 거부할 때 인간은 강신술로 조종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사실, 확인하시라.
어떤 작품인가?
톨스토이 희곡 가운데 가장 밝고 명랑한 작품이다. 작가는 ‘가정 풍자극’이라고 정의했다.
톨스토이가 희곡도 썼나?
투르게네프나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1880년 이후에 4편이 발표되었다. 사후에 발표된 미완성 작품을 포함하면 10편 정도가 있다.
처녀작이 <최초의 양조업자>였나?
그 작품은 민중을 위해 처음 쓴 알코올 퇴치 코믹 교훈극이다. <어둠의 권력>이 가장 유명하다. 정작 작가는 이 작품을 싫어했다.
<어둠의 권력>에 어떤 문제가?
계획과 실행의 부조화, 혐오스럽고 불필요한 지나친 리얼리즘 때문이다.
미완성작이 많은데?
<계몽의 열매>와 <살아 있는 시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완성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자전적 요소가 포함돼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톨스토이 희곡의 특징은?
엄격히 말해 극적이지 않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고전주의적 취향이었지만 그가 쓴 희곡은 비프랑스적이고 비고전주의적이다. <계몽의 열매>를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줄거리는 연속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몇 년에 걸친 이야기에서 주요한 모멘트를 보여 주기 위해 장면은 끊어지곤 한다.
<계몽의 열매>의 의도는 무엇인가?
당시 귀족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강신술 실험을 비판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당시 러시아 강신술은 어떤 것이었나?
죽은 사람 또는 멀리 있는 사람의 영혼을 불러 그 힘으로 물체를 공중에 띄우거나 신령의 말을 듣는다는 술법이다.
샤머니즘인가?
과학적인 설명이 따른다는 점에서 무당이 신을 내리게 하는 샤머니즘과는 다르다.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인가?
농지 매매 계약을 매듭짓기 위해 농부들이 즈베즈딘체프의 저택에 찾아온다. 주인 부부는 저녁에 있을 강신술 실험에 대해 손님들과 이야기하느라 농부들은 뒷전이다. 농부들은 계약하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때 하녀 타냐가 나서 세묜과 짜고 즈베즈딘체프가 주관하는 강신술 실험을 이용해 계약을 성사시킨다. 농부들은 원하는 조건으로 농지를 얻게 된다.
농부와 계약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에게 땅은 목숨이다. 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므로 땅을 얻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들에게 땅은 아픔이다. 러시아 모든 농민의 아픔이기도 하다.
지주에게 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우습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허수아비 같고 멍청하며 당장 내쫓아야 할 병균 덩어리다. 그러나 지주의 삶에서 농부들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러시아 전역에 지주가 소유한 수백만 평 땅이 곧 농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율배반적이고,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농민에게 지주는 어떤 존재인가?
달콤한 삶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존재다. 흰 빵과 차, 다양한 먹을거리, 피아노 연주와 카드놀이, 춤과 무도회가 전부인 방탕한 삶으로 순박한 사람들을 파멸시킨다.
누가 파멸되는가?
지주와 농민 사이에 낀 중간 계층이다. 지주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다. 농부도 지주도 아니지만 양쪽 생활양식을 모두 안다. 슬픈 운명의 존재다.
그들은 이 작품에서 어떤 인물로 등장하는가?
페치카 위에 숨어 사는 알코올중독의 늙은 요리사와 병들어 죽은 하녀 나타샤다.
톨스토이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가장 가망 없는 사람들이다. 지주의 타락한 문명을 강제로 터득하고 길들여진 삶의 수레바퀴에 짓밟힌다. 조상들이 노동을 통해 도덕을 정화시킨 바로 그 땅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다. 결국 결핍과 가난에 시달리거나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 구원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가?
귀농이다.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
지주 귀족들의 타락한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살기 위한 장치다. 그것은 약속된 땅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드문 톨스토이 희곡 한 편이 초역되는 것이다. 그와 러시아 문학을 지루하고 어렵게 여기던 독자라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언제 공연되었나?
1889년에 톨스토이가 아마추어 배우들을 데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처음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는 등장인물 이름에 이 지역 귀족들의 실명을 사용했다. 지역의 실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공식적으로는 1891년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과 주연을 맡아 ‘모스크바예술극단’의 전신인 ‘예술과 문학 협회’ 무대에 올렸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서연이다.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수학했다.
작품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면?
농부 1: (표도르 이바니치에게) 지금 돈을 받으시겠어요?
농부 2: 이젠 돌아가게 해 주세요.
농부 3: (돈을 들고 머뭇거리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을 맡지 않았을 텐데. 이건 뭐 열병을 앓는 것보다 더 심하군!
표도르 이바니치: (문지기에게) 이 사람들을 내 방으로 안내하게. 내 방엔 주판도 있으니까 거기서 돈을 받지. 자, 내 방으로 가시오, 내 방으로!
문지기: 이리들 와요.
표도르 이바니치: 타냐에게 감사해야 할 거요. 타냐가 없었더라면 당신들은 땅을 살 수 없었을 테니 말이오.
농부 1: 그렇고말고요! 이 색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농부 3: 색시가 우릴 위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을까?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가지고는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도 기를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잘 있어요, 영리한 색시! 시골로 돌아오면 우리 집에 들러요.
농부 2: 집에 돌아가면 잔치에 쓸 술부터 담가야겠군.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오도록 해!
타냐: 네, 곧 돌아가겠어요! 돌아가고말고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세묜! 정말 너무나 기뻐요!
≪계몽의 열매≫,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서연 옮김, 281∼282쪽
왜 이 장면을 추천하나?
마지막 장면이다. 타냐 덕분에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하게 된 농부들은 고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이 일로 감격한 세묜의 아버지는 타냐와 세묜을 결혼시켜 고향에 데려갈 뜻을 비친다. 농지를 되찾아 삶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농민, 지주의 방탕한 삶에 의해 파멸될 뻔한 운명에서 건져 올려지는 중간 계층의 구원이 첨예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