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문집
한국 전통 사회의 교양 지식 신간, 법종의 ≪허정 문집(虛靜文集)≫
한가롭게 읊다
청산은 첩첩이고 백운은 층층인데
초당이 깊으니 이 몸도 한가롭네.
마르면 산골 물 마시고
주리면 송화를 따 먹지.
앉아서 나월화 마주하며
언제나 불경 읽고 있네.
간혹 풍월을 읊기도 하고
바위 가 샘물 거닐기도 했지.
마음대로 노닐며 백년 한생을 보내노라.
閑詠
靑山疊兮白雲層
草堂深兮虛靜閑
渴即飮兮山泉
飢即餐兮松花
坐相對兮蘿月華
常披看兮貝多葉
或吟咏兮風月
經行兮泉石
任遨遊兮送一生之百年兮
어떤 작품인가?
≪허정 문집≫에 실린 법종의 작품이다. 부제는 허정가다. 수도자의 한가로운 삶을 잔잔하게 투영한다.
≪허정 문집≫은 어떤 책인가?
그의 시문집이다. 원전은 ≪허정집≫으로, 상권에는 264편 299수의 시가, 하권에는 31편의 문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109수를 뽑아 실었다. 그의 문집은 조선 불가 시문집 가운데 특이하게도 저자 생전에 간행되었다.
허정은 누구인가?
조선 영조 때의 승려다. 이름은 법종이고 호가 허정이다. 열두 살에 출가해 ‘진리가 너 자신에게 있다(今在汝矣)’는 화엄의 원돈법계설(圓頓法界說)을 공부하다가 크게 깨달았다. 묘향산의 여러 사찰에서 강론하고 후학을 교도하다가 법랍 52세에 입적했다. 묘향산, 구월산, 해남 대둔사에 사리를 봉안했다.
불교에서 어떤 위치인가?
청허대사로부터 편양, 풍담, 월저, 설암을 거쳐 정통 계보를 이은 법맥 계승자다.
속세를 버린 스님이 문집을 남긴 이유가 뭔가?
게송을 통해 제자들의 수행을 인도하기 위해서다. 게송이란 인도 경전을 한역(漢譯)하는 과정에서 붙은 중국식 이름이다. 인도 경전에서는 단락이 끝날 무렵에 운문으로 핵심 내용을 읊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가타(gatha)’라고 한다. 이 가타의 ‘가(ga)’를 음차한 ‘게(偈)’에, 송축한다는 의미의 ‘송(頌)’을 붙여서 게송이라 한 것이다. 시불(詩佛) 왕유(王維)가 처음 쓴 이래 승려의 시구를 게송이라 통칭하기도 했다.
문학으로 선(禪)을 추구할 수 있나?
고려 시대 선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도 문학 자체보다는 깨달음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로 오면서 한시는 지식인 사이에서 교유나 자기표현 수단으로 강조되어 포괄적 의미를 갖게 된다. 자기 수행 과정과 깨달음의 경지를 한시라는 고도의 지적 그릇에 담아낸 것이다. 문학을 통한 득도(得度)의 달성은 불가 시 문학의 전반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시는 당대에 어떤 평가를 얻었는가?
“대사의 시는 체법이 유염(柔艶)하며 태도가 평담(平淡)하였다.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여 모든 집착이 이미 다하였으며, 자비로운 구름이 온화하고 지혜의 햇살이 곱고 환하니, 이 어찌 시 본래의 성정(性情)이 아니겠는가! 여러 작품들을 모아 보니 청원(淸圓)하지 않은 게 없어 진실로 창해승보(滄海僧寶)라 할 만하다”고 했다. ≪허정집≫의 서문을 쓴 김정대(金鼎大)의 말이다.
허정의 선시의 특징은?
읽기 쉽다. 담박하면서도 적절한 시어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평이한 시어를 통해 쉽게 다가서면서도 분명한 요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선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호남으로 가는 환몽 스님을 전송하며>, <능파희세 스님을 전송하며>같이 지인과 나눈 시도 있고 <고향 생각>, <가을 산에 혼자 살며> 같은 서정시도 있다. 다양한 시체를 실험했다. 내용은 담박하고 모나지 않으며 분위기는 청원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다.
문은 어떤 것이 있나?
기(記)와 고승의 행장과 사찰 중수를 위한 권선문(勸善文), 부모·사승(師僧) 등을 위한 천혼소(薦魂疏), 비명(碑銘), 산록(山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특히 산록들은 자연 형태와 풍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는 기 한 편과 산록 두 편을 실었다.
그의 글은 어떤 느낌인가?
<금강산기>에서는 내·외금강의 신비로운 모습을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 직접 답사해서 일반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동천(洞天)·봉만(峰巒)·계곡·폭포·암석 등의 형태와 명칭 등을 세세하게 그려 냈다. 간혹 중간에 나오는 대찰들의 형태는 물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환경과 역사까지 기록했다.
이 책을 골라 옮긴 까닭이 무엇인가?
허정 스님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진다. 그래서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시문은 그동안 진흙 속에 묻힌 진주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독자는 어떤 선물을 받게 되는가?
잠시나마 산사의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배규범이다. 중국 베이징공업대학 한국어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