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속임/루르신 거리의 사건
프랑스 희곡, 외젠 라비슈 신간 ≪눈속임/루르신 거리의 사건≫
눈부신 부르주아
해를 바라보면 눈이 부시지만 아무리 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다.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의 삶은 광채를 뿜었지만 자기 합리화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자신의 그림자에 의해 눈부신 모습으로 빛나는 이 괴상한 동물에 대해 라비슈는 비상한 관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공전의 희극이 된다.
로베르: 잘난 체하려고, 폼 잡으려고, 겉멋 부리려고! 요즘 그게 유행이지. 눈속임 해 가며 뽐내고 뻥치고 허풍 떨지. 모두 허영에 빠져서. “양쪽 다 평범한 집안, 중산층 가정이죠” 이렇게 인정하긴 커녕 아이들 장래와 행복을 망치려 들잖아. 아이들은 서로 사랑하는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라고 말하는 자네들이 그러고도 아비라고! 잘 있게!
라티누아: (재빨리 그를 붙잡으며) 로베르 숙부님, 가지 마세요! (진심을 다해) 로베르 숙부님…. 숙부님은 귀걸이를 하고 계시니까 정신도 게으르고 무식해야 할 텐데…. (자기 가슴을 치며) 그렇지 않네요!
말랭거: 오! 그렇지 않죠….
라티누아: (매우 감동적으로) 숙부님 덕분에 정신을 차렸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형편없는 아비였음을 일깨워 주셨어요. (말랭거를 가리키며) 사돈 양반에게도…. 하지만 제 잘못이 아닙니다…. 집사람 잘못이죠. 집사람도 혼이 나야 해요! (흥분을 가라앉히며) 앞으로 혹시 제가 그릇된 길로 빠지더라도…. (갑자기) 그건 그렇고, 우리 다 같이 저녁 식사나 함께하실까요?
<눈속임>, ≪눈속임/루르신 거리의 사건≫ 114∼115쪽, 외젠 라비슈 지음, 장인숙 옮김
어떤 장면인가?
<눈속임>의 한 장면이다. 라티누아와 말랭거가 지참금 문제로 자녀들의 혼사를 깨려 하자 보다 못한 로베르가 두 사람을 꾸짖는다.
이 작품의 특징은?
생동감 있는 언어와 번뜩이는 기지로 완벽한 희극적 장치를 이룩한 걸작이다. 특히 입체적인 인물에 특유의 활기 넘치는 극작술을 배합해 라비슈 희극 미학의 정수를 이룬다. 1861년에 짐나즈 극장에서 초연해 호평받았다.
어떤 이야기인가?
말랭거 부부와 라티누아 부부가 자녀들 결혼을 준비하면서 생활수준을 과장해 상대 집안을 속인다. 거짓말과 눈속임으로 젠체하던 이들은 경쟁하듯 지참금을 부풀린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지참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파혼을 선언한다.
프티 부르주아의 허영인가?
허례허식에 빠져 있는 부르주아 가정의 결혼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라비슈 극작 기간 중 황금기에 해당하는 1860년에서 1870년 사이에 발표된 유일한 2막 희극이다.
<루르신 거리의 사건>은 범죄 희극인가?
라비슈의 걸작 중 주제와 형식이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랑글뤼메는 전날 동창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흥취에 젖어 잠에서 깬다. 어쩐 일인지 동창생 미스탱그도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다. 둘은 아침 식사를 하던 중에 신문을 통해 간밤에 벌어진 끔찍한 부녀자 살인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정황이 두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가운데 이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증거를 하나둘 인멸해 나간다.
호러인가?
호러와 보드빌이 결합된 단막 희극이다. 인물의 무의식을 좇으며 현대인의 광기와 공포를 유쾌한 웃음으로 표출했다.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한 1966년 공연 이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책에서 두 작품을 고른 이유는?
라비슈가 추구한 주제의식을 독특하고 밀도 있게 집약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2막, 하나는 단막이라는 짧은 극 형식으로 희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외젠 라비슈는 누구인가?
파리를 무대로 활약한 ‘보드빌의 황제’다. 특유의 유머로 프랑스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삶을 해부했다.
작품에서 부르주아의 삶을 주로 다룬 이유는?
당시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나자 시민계급, 부르주아지가 지배층으로 급부상해 정치, 경제 권력을 장악했다. 동시에 이들은 주요 관객이었다. 그는 자기 합리화에 빠진 부르주아지의 협소한 세계관에 대해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부르주아에 어떻게 접근했나?
무역업자, 도매상, 제조업자, 은행가, 건설업자, 공증인, 법률가, 건축가, 연금 생활자 등 다양한 산업 직군에서 인물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여러 계층이 있지만 나는 그들 중에서 부르주아를 선택했다. 나는 부르주아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동물은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자료를 제공한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어디서 비롯되나?
메인 작가가 두세 명의 보조 작가와 협업하는 시스템으로 작품을 많이 생산했다. 이에 따라 팔레루아얄 같은 보드빌 전용 극장과 극단이 생겨났고 이들 간에 자유로운 경쟁이 유발되었다. 나중에는 숙련된 배우들의 우수한 기량과 완벽한 앙상블이 작품 성공을 결정지었다.
협업 방식이 성행한 이유는?
극장 운용 시스템이 전적으로 수요에 맞춰져 있었다.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 방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다양한 작품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도 중요한 작가 역량이었다.
이 작품도 라비슈만의 것이 아니라는 건가?
협업은 소재 발굴과 플롯에 국한되었다. 그의 희극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인 재치와 유머, 생동감 있는 언어는 라비슈만의 탁월한 창조력에서 비롯한다.
극작에서 보이는 특징은?
스크리브의 ‘잘 짜인 극’ 창작 기법을 계승했다.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치밀한 플롯 안에 담아냈다. 이런 사실성을 바탕으로 풍습희극 또는 성격희극 작품들을 썼다. 환상과 부조리가 지배하는 보드빌과 소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라비슈와 당신은 어떤 인연인가?
2009년 가을 국립극장에서 주최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에서 줄리 브로센 연출로 공연한 <라까뇨트: 판돈 상자>를 보고 월간지 ≪미르≫에 리뷰를 발표했다. 라비슈와 보드빌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공연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고 한구석에 꽂혀 있던 <이탈리아 밀짚모자>를 꺼내 번역하게 되었고, <표적>, <페리숑 씨의 여행>을 잇달아 출간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장인숙이다. 수원과학대학 공연연기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