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여인
프랑스 현대 소설 신간 ≪방랑하는 여인(La Vagabonde)≫
사랑으로 행복을 열 수 있을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듯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사랑은 먼지처럼, 봄날 햇살 속을 부유하는 공기처럼 자유롭다. 행복은 항복이고 사랑은 자유를 원한다. 둘은 만나지 못한다.
로렌식 레스토랑의 그을린 진열장에 비친 이 얼굴, 짙게 화장한 눈에 턱 밑으로 묶은 긴 베일을 머리에서 발까지 늘어뜨리고, 여기 사람도 저기 사람도 아닌, 무심하고 조용하고 무뚝뚝한 모습의 이 여행자가 막스의 애인이란 말인가? 코르셋과 속치마를 입은 채 브라그의 트렁크로 다음날 입을 속옷을 찾으러 가기도 하고 번쩍거리는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이 지친 여배우가, 몸이 반은 드러나는 장밋빛 기모노를 입고 막스의 포옹을 받으며 환하게 웃던 막스의 애인이란 말인가?
≪방랑하는 여인≫, 콜레트 지음, 이지순 옮김, 234~235쪽
어느 대목인가?
주인공 르네가 순회공연을 다니던 도중 길거리 가게 진열장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장면이다.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단순한 장면을 정체성 고뇌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했다. 심리 묘사가 섬세한 대목이다. 번역문으로는 그걸 느끼기에 한계가 있으나 콜레트 특유의 문장을 짧게나마 느껴 보자. 르네가 막스에게 마음이 넘어간 정황도 포착된다.
어떤 책인가?
1910년에 나온 프랑스 소설이다. 여류작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가 썼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수년 전부터 별거해 온 첫 남편 윌리와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발표한 작품이다. 이전에 발표한 ‘클로딘 시리즈’와 달리 사뭇 개인적인 소설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자유의 추구와 안정된 가정적 행복 갈망이라는 상반된 욕구 사이를 방황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르네 네레는 어떤 캐릭터인가?
팬터마임 배우이자 무용수다. 남편 타양디와 이혼한 후 자유를 꿈꾸면서도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때 막스라는 사내가 적극적인 구애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는 여러 가지 조건이 좋은 남자다. 그러나 결혼할 경우 남성적 권위에 종속된 삶을 사는 게 싫다.
정체성 추구에 관한 얘기인가?
혹자는 이 소설을 정체성 추구에 관한 일종의 입문소설로 평하기도 한다. 그 정체성 찾기는 ‘방랑’을 통해 이뤄진다.
르네에게 방랑이란?
이혼 후 홀로서기를 꿈꾸며 여행을 갈망한다. 이때 여행은 그녀에게 슬픔과 기쁨이라는 양면성을 띠며 다가온다. 르네는 방랑을 자처하면서 길을 떠난다. 그러나 자신의 방랑이 어떤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결국 돌아오고 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결혼 생활과 관련 있나?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치기를 무척이나 원했다. ‘미지의 나라’로, ‘과거도 이름도 없는’ 미지의 장소로 떠나기를 꿈꿨다. 즉 여행이 올가미·함정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해 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떤 방랑이 그려지나?
르네는 무용수이므로 순회공연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애인 막스와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순회공연을 떠난다. ‘허물을 벗는 뱀의 빛나는 도약’처럼 그녀의 떠남은 의미심장하다. ‘허물을 벗는 것’ 그것은 자신의 본질 및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정체성 찾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한다. 처음에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로렌식 레스토랑의 그을린 진열장에 비친 … 무뚝뚝한 모습의 이 여행자가 막스의 애인이란 말인가?”라는 대사가 그 심경을 보여 준다.
흔들리는 정체성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분신이 때론 낯설고 때론 적수로까지 보인다. “너 자신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라는 심정을 내비친다. 그것은 르네의 정체성 상실 위기를 암시한다.
방랑과 정체성에 대한 고뇌는 어디를 향한 도정인가?
르네는 소설 세 편을 쓰고 절필한 작가다. 그러나 고뇌 끝에 알게 된다. 자신의 본질적인 욕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이 과정은 결국 르네의 정체성 회복을 시사한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나타나는가?
르네는 글쓰기를 통해 본연의 자아로 돌아가고자 했다. 주인공 르네의 삶은 작가 콜레트의 삶과 닮았다. ≪방랑하는 여인≫은 글쓰기를 통해 구원받는 작가의 흔적을 쫓는 소설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봐도 되는가?
콜레트는 페미니즘을 드러내 놓고 주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랑하는 여인≫은 페미니즘 문학 범주에서 논할 수 있다. 콜레트는 이 작품을 통해 남성중심주의적이며 권위적인 사회와 문화 풍토 속에서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모순을 고발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를 비판했다. 또 타자화되어 온 여성이 어떻게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지를 보여 줬다.
콜레트의 문체는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어떻게 번역했나?
≪방랑하는 여인≫은 소재의 흥미로움 말고도 은유적이며 수려한 문장 표현 등으로 프랑스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사물의 형태, 빛, 색깔, 소리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비유 가득한 풍부한 어휘들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번역 텍스트에서는 그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어 아쉽다.
콜레트는 어떤 인간인가?
욘 지방의 생소베르에서 1873년 1월 28일에 태어났다. 20세기 초 프랑스 문단에서 손꼽히던 여성작가다. 팬터마임 배우와 뮤직홀의 댄서로도 활동하였던 그녀는 문학적 성과 말고도 굴곡 있는 삶으로 주목을 받았다.
첫 결혼과 그녀의 소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1893년,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열네 살 연상의 앙리 고티에 빌라르와 결혼한다. 필명 윌리(Willy)인 남편은 저널리스트이자 음악평론가이며 대중소설 작가였다. 그의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됐으며 ≪학교에서의 클로딘≫, ≪파리의 클로딘≫, ≪가정에서의 클로딘≫, ≪클로딘 사라지다≫ 시리즈가 나왔다.
자기 작품에 남편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에서의 클로딘≫은 남편의 필명인 ‘윌리’ 저작으로 나왔고 이후 초기 작품들은 ‘윌리와 콜레트 윌리’라는 두 사람 이름으로 나왔다. 이혼 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부터 자신의 이름만으로 책을 냈다.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여성작가가 책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남녀차별이 있던 때다. 그래서 남편 이름을 빌린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 문학사에 두드러진 여성작가가 얼마 안 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첫 결혼 실패 이후 그녀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나?
‘클로딘 시리즈’가 나오는 동안 결혼 생활은 점차 불행해졌고 1906년 마침내 윌리와 결별한다. 그 뒤 생계 때문에 뮤직홀 댄서와 팬터마임 배우로 활발히 활동한다. 공작의 딸과 4년 간 동거, 13세 연하남과 교제, 신문 편집장과 재혼 및 이혼, 30세 연하남 양아들과 교제한다. 1935년에 만난 세 번째 남편 모리스 구드케와 여생을 함께했다.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나?
1948년에 총 15권 분량으로 전집이 나왔다. 그녀의 작품성과 인기를 증명하는 바다. 많은 작품이 희곡, 오페라, 영화 등으로 각색되었다.
공인으로서 성공했나?
1935년 벨기에 프랑스어문학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고 1945년에는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1949년에는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1954년 전후의 상황은?
관절염으로 괴로워하며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지냈다. 1954년 8월 3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콜레트의 화두는?
‘사랑이 행복의 열쇠일까?’다. 그녀의 모든 작품은 이 같은 근본적인 질문 주위에서 맴돈다. 그 결과 사랑하는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남성이 정작 책임을 여성에게 미루는 사회적 통념을 뒤엎고자 한다. 그녀의 경험은 유혹하고 배반하는 자, 혼란을 도발하는 자는 이기심과 편협한 정신을 가진 남성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존중과 부드러움, 너그러움을 지님으로써 삶의 지혜를 체득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점이 그녀의 작품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주목받게 하는 이유가 됐다. ≪방랑하는 여인≫도 그러한 메시지를 매우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지순이다.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