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만 작품집
독립 만세 6. 조용만의 <허희歔欷>
한숨짓다
조용만은 유약한 인텔리의 우울한 시선으로 1930년대 식민지 경성의 표정을 읽어낸다. 회색의 식민지 지식인들. 그들은 댄디하지만 추레했다. 현실의 모순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쓸쓸히 한숨만 지으며 자기 합리화를 위한 내면으로 들어갔다. 제목 ‘허희(歔欷)’는 ‘한숨짓다’란 뜻. 자연스레 ‘충량한 국민’이 되었고, 세월이 흘러 작가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내게는 재즈밖에 없네.”
그리고 멀리 아래쪽 창밖으로 별같이 반짝이는 등잔불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금도 너무 슬퍼서 재즈만 틀어놓고 앉아 있었네. 그것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들떠서 좀 잊어버리겠어. 여기는 보고 듣느니 너무 슬픈 것뿐이네.”
그리고는 다시 시름없이 담배 연기를 쭉 뿜었다. 그때에 멀리 아래쪽에서 아이들의 흐느껴 우는 소리와 늙은이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구슬프게 들려왔다.
“으…응 또 우는군!”
M은 울음소리를 듣더니 다시 처연한 빛을 띄우고 눈살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민구를 바라보았다.
“여보게 한 장 더 틀어주게. 저 어린 애들하고 노인이 우는 소리는 참 들을 수 없어. 오늘 아침에 저 아랫집에서 여편네가 죽었다네.”
속 깊이 터져 나오는 마음의 울음. 그 길게 내뿜으며 느껴 나오는 울음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민구도 어느 겨를에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어서 틀어주게. 우리 술이나 먹을까?”
M은 더 참을 수 없는 듯이 레코드 앞으로 오더니 다시 손뼉을 쳐서 하녀를 불렀다.
언덕 아래 사람들은 요사이 생활이 점점 더 궁색해 갔다. 자유노동자와 행상과 직공들이 대부분인 그들의 생활은 요사이 심각한 공황과 함께 말라갔다. 조밥 수수떡 낫개범벅조차 먹지 못하고 굶는 집이 많아졌다. 오늘 아침에 그중의 한 집에서 애를 밴 여편네가 며칠을 굶어오다가 아이를 지리 낳고 기진해서 죽었다. 사내는 엊저녁에 쌈을 하고 나간 뒤에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애들과 늙은이가 굶은 채 붙들고 앉아서 울고만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그것이라고 M은 이야기하였다.
“아까 하녀를 시켜서 돈하고 밥을 갖다 주었더니 큰아이들은 무엇을 아는지 더 울기만 하고 어린 것들은 울음을 딱 그치고 좋아라고 밥을 보고 허겁지겁을 해서 덤벼들더래.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찌나 불쌍한지.”
M은 시름없이 말하고 눈을 꿈벅거리면서 술잔을 들어서 쭉 들이켰다. 그러다가 M은 별안간 술잔을 상 위에 팽개치고 소리를 질렀다.
“대체 자네 어떻게 할 텐가?”
“네?”
민구는 의외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서 M을 보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귀 옆 심줄을 유난히 벌렁거리면서 뚱그런 눈으로 민구를 노려보았다.
“뭐라니? 자네들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말야. 자네들은 이렇게 놀고만 있을 때가 아닐세. 카페로 쏘다니면서 술 먹고 떠들 때가 아냐.”
M은 꾸짖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엊저녁에는 친구에게 걸려서 카페 구경을 갔었네. 우연히 거기 박 군하고 여럿이 와서 떠들어대데그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들어봤더니 자기네들이 문예잡지를 내느니 하고 자랑을 하면서 여급을 붙들고 기염을 토하데그려. 그리고는 갖은 유치한 소리는 다하고 나중에는 여급에게 키스를 도적질 하려다가 뺨맞는 꼴이야. 허! 기가 막혀서….”
M은 물 퍼붓듯이 말하고 민구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듯이 경멸하는 빛을 띄우고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술잔으로 먹는 게 성가신지 병째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그래 자네들은 그렇게 경박한가? 술이나 먹구 계집이나 따라다니구 그러면서 무엇이 어째? 그래 내가 거짓말인가?”
민구는 낯이 벌개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M의 말은 점점 기운차 올라서 강의 때같이 손짓을 하면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정말 기운을 낼 때에는 무기력하게 슬슬 피해 다니면서 술과 계집을 보면 생기가 나서 죽을 둥 살 둥 하는 꼴이니 대체 그 기운은 어디서 나오느냐 말야.
“…”
“그렇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이 누구에게든지 머리를 숙이고 다니면서 그저 고원이든 순사든 무어든지 감지덕지해서 얻어가는 충량한 국민뿐이고….”
M은 충량한 국민이라는 데서 기막히는 듯이 픽 웃었다. 그리고 민구의 잔에 술을 철철 넘게 따라서 민구 앞에 내밀었다.
“자 어서 들게.”
자기는 과자를 집어서 우둑우둑 깨물었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 하지만 자네들의 꼴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러네. 글쎄 왜 모두 그 모양이란 말야. 자네도 문과에 다니니 박 군이 한다는 잡지에 한몫하고 졸업하고 나서 얌전한 중학교원이나 늙을 때까지 해먹을 텐가? 그따위 더러운 놈이 될 테거든 제발 가주게, 어서 가주게.”
M은 창밖으로 손을 몇 번이나 내흔들어 가라는 표시를 하였다. 민구는 술 마신 잔을 묵묵히 상 위에 놓았다. 어둠 속의 울음은 그쳤다가 또 다시 들려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늙은이의 기운 없는 울음소리만 가냘프게 들려왔다.
▪ <<조용만 작품집>>, 조용만 지음, 오태호 엮음, 106~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