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박봉우 시선
초판본 한국시 신간 ≪초판본 박봉우 시선≫
나비가 벽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휴전선을 타고 앉아 박봉우는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 현실의 벽을 두드린다. 꽃에 앉지 못한 나비는 문이 없는 벽을 따라 아지랑이 되어 펄럭인다.
내 딸의 손을 잡고 1
내 생활은
이제
내 딸의 손을 잡고.
풀잎들이 이슬 맺은
강이 흐르는 언덕길을
내 딸의 말을 배우며
내 생활은.
혁명도 자유도 독립도
사랑이거나 눈물도
내 딸의
손목 잡고
잠시 잊는 시간.
내 생활은
이제
내 딸의 손을 잡고.
≪초판본 박봉우 시선≫, 이성천 엮음, 147쪽
왜 이 작품을 골랐는가?
대표작은 <휴전선>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경험한 그가 생의 고투 과정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작품, 따뜻한 서정을 감싸 안은 작품도 소개하고 싶다.
박봉우는 누구인가?
전후의 한복판에서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시작 활동의 전 기간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시인이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을 투고해 등단했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3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서중 시절 이미 ≪진달래≫ 동인을 결성했으며, 1952년 고교 2학년 때 ≪수험생(受驗生)≫에 작품을 발표해 미당 서정주와 다형 김현승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전남일보≫에 입사해 취재차 전남 목포에 갔다가 지역 폭력배들에게 끔찍한 구타 사고를 당한다. 이로 인해 평생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고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 3월 2일, 만 56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그의 시는 무엇을 말했나?
민족 동질성 회복과 분단 극복의 주제를 주로 다룬다.
분단 극복은 당시 시단의 공통 주제 아닌가?
전쟁 현장의 참혹성을 형상화하거나 인간성 상실에 대한 허무 의식, 혹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고취는 이른바 전후문학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분단 극복의 당위성과 민족 동질성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 점, 이러한 주제적 특성이 그의 작품 활동 기간 전반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등에서 차별화된다.
<휴전선>에서 민족과 극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휴전선은 지형학적 군사 경계선이 아니다. “정맥은 끊어진 체” 민족의 “야위어 가는 이야기”만 남아 있는 정신의 불모지대로 인식한다.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을 동반한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작품의 도입부와 말미에서 각각 제시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姿勢로 있어야 쓰는가”라는 시구는 분단 현실에 대한 시적 화자의 안타까움과 민족의 정체성 회복에 대한 당위성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나비’와 ‘벽’의 대립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나비’와 ‘벽’은 ‘창’, ‘음악’, ‘겨울’, ‘꽃’ 등 몇몇 시어들과 함께 시적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핵심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벽과 나비는 견고하고 고착된 장애물과 가냘프고 왜소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원적 존재의 대립 관계로 나타난다.
<황지에 꽃핀>에서 나비와 벽은 어떻게 사용되나?
자유 지향의 ‘나비’는 왜소한 존재로, ‘벽’은 ‘나비’가 넘어서야 할 견고한 대상으로 그려진다. 궁극적으로 고정적이고 견고한 ‘벽’을 부정하고 자유를 지향하는 ‘나비’의 존재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나비’의 정체는?
박봉우 시정신의 상관물 혹은 시인의 분신이다.
그렇다면 ‘벽’은 휴전선인가?
1970년대의 군부 독재 시기에 강제되고 편향된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자 남북의 동질성을 가로막는 정신적 불구의 대상이다.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의 ‘벽’이기도 하다.
박봉우 시작 30년의 발전은 무엇인가?
변화를 찾기 힘들다. 박봉우 시의 한계다. 30여 년 동안 박봉우의 시는 대체로 ‘개인 병력’ 등의 이유로 시상의 변화가 거의 없다. 기존 창작 방법론과 시작 태도를 유지한다.
시 형식이 단조롭고 유사한 주제 의식이 반복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표현 기법도 별다른 발전 없이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뭔가?
전쟁 이후 남북 대결의 모순적 공간에서 분단 극복 의지와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박봉우 시의 주제 의식은 그의 시의 형성 원리이자 삶의 원리로서 작용한다.
4·19와 자본주의, 서구화에 대한 감각 표현은 어떻게 봐야 하나?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내면화한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와 <소묘(素描) 33>을 위시한 소묘 연작 일부, 왜곡된 현실 자본주의와 맹목적 서구화에 찌든 1970년대 ‘서울’의 우울한 풍경을 묘사한 <서울 하야식(下野式)>, <경제학 교수 휴강> 등이 없지 않다.
서정성은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가난 때문에 포장마차를 하다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친 <겨울 포장집의 아내>, 정신의학에 오랜 기간 의존한 시인이 딸을 향해 부정(父情)을 내비친 <내 딸의 손을 잡고> 등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절절한 사랑이 묻어난다.
당신이 이 시집을 통해 독자에게 전할 말은?
시대사적, 혹은 개인사적 상처를 안고 살다 간 한 실존의 초라하지만 소중한 삶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당신은 누군가?
이성천이다. 경희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