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난중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한 편 한 편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친필 초고와 마찬가지로 내려쓰기 편집에다가 충분히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꼭 읽어야 할 국민 독본, 그러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진중일기로서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한 고전. 노산 이은상은 “민족의 성전(聖典)”으로 “우리 국민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국민 독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작 <난중일기>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이는 드물다.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중일기’란 제목처럼 내용도 어렵고 딱딱하리라는 생각에서 선뜻 접근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인간 이순신의 생생한 육성을 마치 학술 문헌처럼 담아낸 기존 책들의 편집도 <난중일기> 독서에 장애로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새로운 <난중일기>, 이 책이 필요했다.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이 책은 노산이 1960년대 역주해한 <난중일기>(1968, 현암사)를 새롭게 다시 펴낸 것이다. 노산은 이순신 장군의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있는 내용을 보충해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앞서 1960년 당대 최고의 한학자들과 함께 작업한 <국역주해 이충무공전서>(충무공기념사업회 간행)가 기초가 되었다.
노산 역주해본은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격이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모든 <난중일기> 국역본은 이 책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대학 시절 읽었던 <난중일기>도 바로 노산 역주해본이었다.
1960년대 번역이라 문장과 표현이 지금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맞춤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두었다. 다만 관련 자료를 참조해 명백한 오류 또는 오기는 수정했다. 또한 현재 지명 설명은 현재 행정구역상 이름을 반영하는 등 현재 독자들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 없도록 다듬었다.
가장 <난중일기>다운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일기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상황과 진중 생활을 꼼꼼히 기록하는 한편 국정, 가족, 동료 등에 대한 내밀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일기마다 간결한 문체에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한 편 한 편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우선 친필 초고와 마찬가지로 내려쓰기로 편집했다. 충분히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아래쪽엔 남해의 물결, 조선과 일본의 전선들을 문양처럼 배치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산, 명량이나 노량 바다의 물결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다.
책의 분량은 약 900쪽에 이른다. 그럼에도 책을 펼쳐 보기에 불편하지 않다. PUR 제본이라는 제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눈치 챘겠지만, 책값 15,920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을 상징한다.
백문이 불여일독(讀). 직접 한번이라도 이 책을 펼쳐 보면 이 책의 가치를, <난중일기>의 가치를, 영웅 이순신의 진정을 알게 될 것이다.
200자평
<난중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한 편 한 편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친필 초고와 마찬가지로 내려쓰기 편집에다가 충분히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지은이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문반 가문의 셋째로 태어났다. 1576년에 병과로 급제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에서 전승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최초로 임명되어 1594년에도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7년 1월 조정을 기망한 죄로 통제사직에서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출옥 후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9월 16일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 척의 왜선과 맞서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1598년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 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3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옮긴이
이은상은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이다. 호는 노산(蘆山)으로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현대 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 ‘봄처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호남신문사 사장, 대구 청구대 교수,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한민족문화협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영남대 교수 등을 지냈다. 언론, 학술, 사학 방면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1960년대 한학자들과 함께 <이충무공전서> 국역 작업에 참여했다. 전서본과 친필 초본을 합쳐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 펴낸 <난중일기>는 이후 나온 모든 국역본들의 바탕이 되었다. 역주해본 <난중일기>와 함께 저서로 <노산 시조집>, <조국 강산> 등 시조집과 <이충무공 일대기>, <조선 사화집>, <민족의 맥박>, <노변필담>, <피어린 육백 리> 등이 있다.
차례
임진(壬辰)…11
계사(癸巳)…71
갑오(甲午)…197
을미(乙未)…369
병신(丙申)…481
정유(丁酉) 하나…630
정유(丁酉) 둘…749
무술(戊戌)…821
작품 해설 ‘세세에 번쩍이는 역사의 면류관’…835
신구 시간 대조표…874
신구 지명 대조표…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