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라신의 일곱 번째 비극 <바자제(Bajazet)>는 17세기 터키 궁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그리스신화나 로마 역사를 다룬 라신의 다른 비극들과 비교하면 동시대와의 시간차가 그리 크지 않은 셈이다. 라신은 동시대 사건을 비극의 주제로 다룬 것에 대한 관객의 비판을 불식시키고자 터키라는 공간적 거리를 통해 비극에 필요한 거리감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시선”을 확보하려 했다.
<바자제>의 공간적 배경인 터키 궁정은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관습과 독특한 지방색을 가지고 있지만, 권력 체계의 면에서 보면 당시 프랑스 절대 왕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라신 비극에서 정치적 권력이 갖는 위계질서는 사랑의 힘 앞에서 무력해지고, 한편 사랑의 힘은 권력의 형상을 한 운명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낸다. <바자제>의 주인공들은 권력 암투라는 특수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집착, 우려와 질투라는 연인들의 보편적 심성을 다룬 심리 비극이기에 그 심리적 진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터키 황제 아뮈라는 비장스(콘스탄티노플)를 떠나 페르시아 정벌에 나선 참이다. 재상은 황제가 전장에서 돌아와 자신을 파멸시킬 것을 예상하고 황제의 동생 바자제를 옹립할 계획을 세운다.
황제는 전장에서 노예를 보내 바자제를 암살토록 해 황권을 위협할 소지를 없애고자 하지만, 재상은 명을 따르지 않고 그 노예를 죽인다. 황제로부터 문책을 당할 것이 분명한 재상의 항명은 그의 후속 행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고, 비극적 시간의 톱니바퀴는 작동을 시작한다.
황후 록산은 재상의 정략에 이끌려 바자제를 사랑하게 되지만, 바자제가 황제의 친척 아탈리드 공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에게 사랑과 결혼을 강요한다. 아탈리드는 바자제가 록산과의 결혼을 받아들이자, 그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의심과 질투에 놀란 바자제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이 록산에게 알려지고, 록산은 바자제의 죽음을 명한다. 바자제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던 재상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록산 또한 그녀의 배신을 간파한 황제의 밀사에게 죽임을 당하며 극은 파국을 맞는다.
200자평
≪페드르≫, ≪이피제니≫에 이어 세 번째로 소개하는 장 라신의 작품. 사랑과 질투, 권력욕으로 얽혀 있는 궁정의 인물들이 결국 황제의 절대 권력에 의해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연인들의 보편적 심성을 다룬 심리 비극으로서, 그 심리적 진실은 현재까지도 빛을 발한다. 12음절 시구의 형식미와 유연함 속에서 프랑스 고전 비극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지은이
장 라신은 프랑스 17세기 고전주의의 대표적 비극 작가다. 파리 근교 페르테밀롱에서 태어나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니콜과 아르노 등 장세니스트 학자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통달한 그는 루이 14세 치하에서 극작 활동을 했고, 1677년 역사 편찬관으로 임명되어 궁정인의 직책을 수행했다. 대표작으로는 그리스신화를 주제로 다룬 비극 <앙드로마크(Andromaque)>(1667), <이피제니(Iphigénie)>(1674), <페드르(Phèdre)>(1677) 등이 있다. 그의 비극은 사랑의 정념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불가피한 파멸을 그린다.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가 담당하는 불가항력적인 역할은 그리스 비극에서의 운명의 기능을 대체한다고 평가되며, 특히 여성 심리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12음절 시구인 ‘알렉상드랭(alexandrin)’으로 쓰인 5막 비극들은 완벽한 형식미를 가졌으며, 그 유연성은 음악에서의 모차르트에 비유되기도 한다.
옮긴이
송민숙은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3대학교에서 장 라신 연구(≪라신과 그 경쟁자들≫)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연극을 강의했고, 현재 순천향대학교에서 ‘예술의 즐거움’, ‘공연예술 입문’을 강의하고 있으며, 계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연극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논문집 ≪연극과 수사학≫(연극과 인간, 2007), 연극 평론집 ≪언어와 이미지의 수사학≫(연극과 인간, 2007) 등이 있고, 역서로 ≪프랑스 고전 비극≫(동문선, 2002), ≪서양 연극의 무대 장식 기술≫(동문선, 2007) ≪페드르≫(지만지, 2008), ≪이피제니≫(지만지, 2008) 등이 있다. 공저로는 ≪동시대 연극 비평의 방법론과 실제≫(연극과 인간, 2009), ≪세계 연극 239선≫(연극과 인간, 2008), 공역서로는 ≪코르네유 희곡선≫(이화여대출판부, 2006)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몰리에르의 연극 ≪동 주앙≫과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비교 연구>, <죽음의 연극적 형상화-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 가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연극에 나타난 아이러니 연구>가 있다.
차례
해설······················7
지은이에 대해··················11
첫 번째 서문···················15
두 번째 서문···················17
나오는 사람들··················21
제1막······················23
제2막······················53
제3막······················83
제4막·····················109
제5막·····················137
옮긴이에 대해··················165
책속으로
자이르, 내 잘못을 고백해야겠어.
나는 요동치는 질투를 막지 못했어.
-49쪽
결국 모두 끝났어. 내 술책,
부당한 의심, 지독한 변덕,
내 죄로 인해 연인이 죽는
고통스런 순간에 이르렀네.
-162∼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