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土幕>은
빈궁한 두 농가, 명서네와 경선네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1931년 12월∼1932년 1월까지 ≪문예월간≫에 발표되었다. 한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당대에는 농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서민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허탈감 등을 현실감 있게 조명한 절박한 비극성이 오히려 비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빛난다. 이 때문에 <土幕>은 식민지 시대 우울하고 궁핍한 현실을 재현한 당대 최고의 리얼리즘 희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33년 홍해성 연출로 극예술연구회가 초연했다.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은
계순네와 덕조네 두 농가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33년 11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 1932년 발표한 <土幕>, 1934년 발표한 <빈민가>, <소>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가난 때문에 자식을 잃어야 하는 어머니들의 상실감과 그 비극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는 양상을 현실감 있게 그림으로써 식민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외국극 연구와 번역극 레퍼토리에 치중했던 극예술연구회에 창작극 대본을 제공하며, 1933년 극예술연구회 5회 공연에서 유치진이 직접 연출을 맡아 상연했다.
200자평
유치진의 대표 희곡 2편을 엮었다.
지은이
유치진은1905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둔 뒤 귀국해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를 조직해 신극 운동을 벌였다. 일제 탄압으로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되자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 <흑룡강(黑龍江)>(1941), <북진대(北進隊)>(1942), <대추나무>(1942) 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활동이 뜸하다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서 민족극을 주도했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해 초대 원장(1947)을 지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했고, 자작극 <원술랑>으로 개관 기념 공연을 가졌다. 6·25가 발발한 뒤에는 은거하면서 희곡 창작에만 전념했다. 주요 희곡은 <토막(土幕)>(1932),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1933), <소>(1934), <마의태자>(1937), <자명고>(1947), <한강(漢江)은 흐른다>(1958) 등이다.
차례
土幕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
<土幕>은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은
유치진은
책속으로
할머니: 너도 잊지 않았겠구나. 지금부터 다섯 해 전, 그때도 오늘과 같이 가을 날씨가 따뜻했다. 우리는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지내고 수리조합 제방 공사에 역사 나간 아이 애비를 기다리고 있었지. 같이 모여서 저녁이나 먹으려고- 그러자 조금 있노라니까, 아! 지금도 내 눈앞에 선하다. 저 사립문이 쩍 열리더니, 가마니를 덮은 들것이 하나 들이닥치지 않았겠니? 같이 따라온 수리조합 서기가 들것을 멍히 바라보고 섰는 내 앞에 보따리를 내놓더니, 지금 꼭 네가 하듯이 이것은 저고리, 이것은 허리끈, 이것은 바지, 이것은 버선…
어머니: (견딜 수 없어 소리친다.) 어머니! 사우스럽게 죽은 그이의 얘기는 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바들바들 떤다.)
할머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글썽거리며) 우리는 하늘에 너무도 버림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 동네는 너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