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나오는 원술 이야기를 소재로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한편 진달래와 사랑 이야기를 더해 대중성을 높였다. 원술은 분란을 일으켜 신라를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싸움터에 나갔다가 패한다. 겨우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오지만, 화랑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어겼다는 이유로 김유신에게 크게 혼나고 쫓겨난다. 우연히 알게 된 시골 처녀 진달래와 떠돌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원술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집에 찾아가지만 외면당한다.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하고 다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원술은 우연히 전쟁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 위기에 놓인 신라를 구한다. 왕은 원술에게 상을 내리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진달래와 함께 길을 떠난다. 작품이 쓰인 1950년 무렵이 좌우 이념 대립과 외세 개입으로 혼란했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할 때 나당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당시 정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우리 민족을 이념적으로 분열시킨 외세를, 외세에 맞서 통일을 이룬 신라는 남한 사회를 상징한다. 이때 주인공 원술은 국가와 아버지를 실망시켰던 자신을 반성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긍정적인 민족 주체로 그려진다.
200자평
유치진이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을 맡아 1950년 국립극장 개관 공연을 위해 쓴 작품이다.
지은이
유치진은1905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둔 뒤 귀국해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를 조직해 신극 운동을 벌였다. 일제 탄압으로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되자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 <흑룡강(黑龍江)>(1941), <북진대(北進隊)>(1942), <대추나무>(1942) 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활동이 뜸하다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서 민족극을 주도했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해 초대 원장(1947)을 지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했고, 자작극 <원술랑>으로 개관 기념 공연을 가졌다. 6·25가 발발한 뒤에는 은거하면서 희곡 창작에만 전념했다. 주요 희곡은 <토막(土幕)>(1932),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1933), <소>(1934), <마의태자>(1937), <자명고>(1947), <한강(漢江)은 흐른다>(1958) 등이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一막
제二막
제三막
제四막
제五막
<원술랑>은
유치진은
책속으로
원술: 신이 싸움터로 나아간 것은 상을 받기 위하여서가 아니옵고, 오로지 신의 지은 죄를 씻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나이다.
왕: 연이나, 이것을 사양함은 짐의 뜻을 너무나 저버림이 아닐가?
원술: 아니오. 아니오이다. 상감마마께서 신이 감히 이 나라 창칼을 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신에게는 과람한 처사이온대 이 우에 상까지 받으라 하심은 도리어 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웃음거리를 만드심이 아닌가 하옵니다. 신은 인제 어디서나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삽고, 죽으면 떳떳이 저승에서 신의 부친을 만날 수 있게 되었사온즉 인간으로서 이 이상 무슨 상이 또 있사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