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만희는 노인의 삶 자체를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노인들의 말과 행동에는 그들이 살아온 삶이 축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노인 동화”처럼 써서, “노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정서를 담아 보고 싶었다”고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는 일종의 ‘철학적 노인 동화’인 셈이다.
주인공은 왕년에 도박, 사기, 절도, 밀수 등 각종 범죄로 한가락 했던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 셋이다. 이들은 혜초 여사의 제안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좇아 신라 고승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도굴하고 있다. 도굴은 3년째 진행되고 있으며, 이들은 매일같이 지하 갱도를 파 내려가며 보물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극 중에서 세 노인은 도굴지를 돈황사라 부르고 자신들의 이름을 왕오, 천축, 국전이라 바꿔 부른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 주는 설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천축이 무대 한쪽에 써 내려가고 있는 자성비문과 지하 갱도의 음습함은 이들에게 죽음만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매일 지하 갱도로 들어가는 인물들의 행동 자체가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200자평
왕오, 천축, 국전이라는 세 인물의 앙상블을 통해 철학적 주제를 노련하게 유머로 이끌어 간 작품이다. 1993년 국립극단이 공연했으며, 1997년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시리즈 제1탄’으로 재공연할 당시 국립극단 최초로 연장 공연을 가져 화제가 되었다. 연출은 강영걸이 맡았다.
지은이
이만희는 1954년 충남 대천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동아일보≫ 장막극 공모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라 속의 시체들>이 입선하면서 극작가로 등단했다. 이 작품은 뒤에 <돼지와 오토바이>로 개작되었다. 1989년 <문디>로 주목받은 뒤 1990년 극단 민예가 공연한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로 삼성문예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동아연극대상 최우수작품상, 백상예술대상 희곡상(1991)을 수상했다. 1992년에 초연한 <불 좀 꺼 주세요>는 3년 6개월간 1157회 공연하는 장기 흥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93년 <돼지와 오토바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로 영희연극상을, 1996년 <돌아서서 떠나라>와 <아름다운 거리>로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인생 탐구라는 연극관에 기초해 인간관계를 통한 실존 문제를 불교적으로 성찰한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분신극(分身劇)’, ‘극중극’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약속>, <보리울의 여름>, <와일드카드> 등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장
2장
3장
<피고 지고 피고 지고>는
이만희는
책속으로
천축: 난 내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마다 은하계를 생각하네. (서정적 음악) 태양은 지구보다 백만 배나 크고 은하계에는 금성, 목성 다 합친 태양계가 천억 개쯤 있다더군. 헌데 우주에는 이렇게 큰 은하계가 수십억 개쯤 있대. 허니 이 우주는 얼마나 클 것인가. 이 몸이 우주라면 우리 은하는 새끼손톱에 있는 때에 불과할 것이고 그 때 속에 천억 마리의 세균이 다닥다닥 붙어살고 있는 게 태양계란 말이야. 지구는 다시 또 나눠져야 하니 표현할 길도 없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