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이 책이 원전으로 삼은 ≪여수 시초≫(1940)는 박팔양의 첫 번째 시집으로,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20년대 초반부터 창작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수 시초≫는 창작 시기와 작품 주제에 따라 근작(近作), 자연·생명, 도회, 사색, 애상, 청춘·사랑, 구작(舊作)으로 나뉘어 있다. ‘근작’에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발표한 시들이 실려 있다. 박팔양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드러난 서정적인 작품들이다. ‘도회’ 부분에는 1926년과 1933년 사이에 발표한, 도시 문명을 노래한 시들이 있다. 카프 가담 초기와 카프 탈퇴 이후 박팔양의 관심이 도시 풍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카프 탈퇴 이후 박팔양은 정지용 등과 구인회에 가담했는데 구인회가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이 ‘도회’에 있는 시들이다. 또한 도회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면서 같은 시기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도 시에 담았다. 서정적인 주제로 빼놓을 수 없는 청춘과 사랑에 대한 시는 1928년부터 1938년까지 발표한 것이다. ‘구작’에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발표한 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시에는 당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듯 우울하고 외롭고 또 무력한 화자가 등장한다. 이 ‘구작’과 ‘애상’에 실린 시들은 민족 현실을 담되 서정성을 버리지 않은 박팔양의 시적 지향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색’에서 박팔양은 우울과 슬픔에서 벗어나 보다 활기찬 목소리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색’에는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창작된 시들이 실려 있는데, 희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현실화해 나가고자 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 민족의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여수 시초≫에서 보여 준 박팔양의 시적 태도는 문학사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의의를 가진다. 지식인으로서 민족의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시인으로서 예술성을 추구한, 현실과 서정의 조화를 추구했던 박팔양의 문학적 태도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갔던 한 예술인의 치열한 내적 갈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200자평
당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해방 후 북한에 머물렀던 이유로 많은 논의가 없었던 박팔양.
그의 첫 번째 시집 ≪여수 시초≫에서 47편의 작품을 선별했다. 시인이자 평론가로 카프와 구인회에 가담했던 박팔양의 다양한 시적 경향을 들여다본다. 박팔양이 추구했던 ‘현실과 서정의 조화’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시의 서정성과 예술성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느낄 수 있다.
지은이
박팔양(朴八陽, 1905. 8. 2∼1988. 10. 4)
1905년 8월 2일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8세 때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6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후일 카프의 주도 세력이 되는 박영희, 김기진, 김복진 등을 동급생으로 만났고 송영, 박세영, 나도향 등과 교류했다. 박팔양이 프로문학을 지향하고 후에 카프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여기에서 형성된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박팔양은 ≪요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정지용, 김화산과 교류하게 되면서 정지용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김화산의 다다이즘적 경향을 섭렵하며 다양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23년 <신(神)의 주(酒)>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등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당 작품의 작가 박승만이 박팔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박팔양은 1924년 4월 경성법전 졸업 후 1925년 6월까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지냈다. 이후 북에서 문학 지도자로 활동하기 전까지 박팔양의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종사하고 있던 언론계는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박팔양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5년 8월 23일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의 일원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입했다. 박팔양의 카프 탈퇴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없고, 1927년 제1차 방향 전환 직전이라는 주장과 1930년 볼셰비키화로서의 제2차 방향 전환 직후라는 설 등 두 가지 대표적인 가설이 회자된다. 최근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두 번째 가설로, 박팔양의 작품 세계가 1930년 후 프로 시와 확연한 거리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어 동의를 얻고 있다. 이 시기는 카프 내 강경파인 박영희를 중심으로 윤기정, 이북만 등이 프로문학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프로문학 작품의 예술성이 거의 사라져 가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사상성과 예술성의 절충을 위해 고심해 온 박팔양이 이 시기 카프에서 탈퇴하게 되었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1931년 11월 중외일보가 중앙일보로 재창간될 때, 박팔양은 창간 사원으로 참여해 사회부장을 맡고 그 후 1937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했다. 이때 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는 박영희가 재직했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로 개제된 후에는 이태준이 학예부장을 맡았다. 이태준은 정지용과 함께 구인회를 주도했던 인물로, 정지용, 이태준과의 교류와 문학적 교감은 박팔양을 구인회에 가담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로 작동한다. 1934년 6월 박팔양은 구인회에 가입했다. 구인회는 반카프적 성격을 지니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에서 중심인물이 아니었던 박팔양은 1936년 탈퇴하고 1937년 만주로 건너가서 만선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염상섭이었고 박팔양은 사회부장 겸 학예부장으로 영입되었다. 1939년에는 만선일보의 간도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된다. 만주국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만선일보 재직과 함께 최근 친일 단체인 협화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여부에 관한 논란도 있다. 1940년 해방 전 그의 유일한 시집인 ≪여수 시초≫를 박문서관에서 발간했다. 당시 강화된 검열제도에 의해 작품이 누락되거나 개작된 시가 다수 실렸다. 그는 일제의 극심한 한글 탄압이 있었던 해방 이전까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평북신보와 공산당 평북도당 기관지인 바른말 신문사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에 좌익계 신문인 정로의 편집부장을 지냈다. 1947년 정로가 로동신문으로 재창간된 후 박팔양은 부주필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참가해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7년 해방 전후 작품을 모아 ≪박팔양 시선집≫(문화전선사)을 펴냈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조선어문학부 교원과 신문학 강좌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종군 작가로 참전해 공로메달 및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1951년 김일성대학에 복직해 1954년까지 근무하고, 1954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된 뒤, 1956년에 이 동맹의 중앙위원, 중앙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시분과위원회 위원, 남조선문학연구 분과위원회 위원, 문학신문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1956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해방 후 작품을 중심으로 ≪박팔양 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을 펴냈다. 1958년 1월 조-쏘친선협회 중앙위원으로 문화예술단을 이끌고 구소련, 폴란드 등을 순방했고, 같은 해에 조옥희의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 서정서사시집 ≪황해의 노래≫(동 출판사)를 펴냈다. 1959년 ≪박팔양 선집≫에 전후 신작 30여 편을 보충해 ≪박팔양 시선집≫(동 출판사)을 냈고, 1961년에는 김정아의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서사시집 ≪눈보라 만 리≫(동 출판사)를 출간했다. 1966년 한설야가 숙청당한 후 1967년 반당 종파 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1년에 복권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1988년 10월 4일에 사망했다.
엮은이
추선진(秋善眞)은 1977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문학에 매료된 청소년기를 보내고, 1995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1999년 졸업했다. 같은 해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2007년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1≫,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2≫, ≪한국 현대문학 100년 대표소설 100선≫, ≪문학비평 용어 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천맥≫, ≪자유부인≫을 엮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近作
失題
善竹橋
길손
가을밤
시냇물
소복 입은 손이 오다
봄
바다의 八月
四月
새해
自然·生命
여름밤 하늘 우에
목숨
내가 흙을
달밤
都會
하루의 過程
點景
近咏 數題
都會 情調
仁川港
太陽을 등진 거리 위에서
思索
勝利의 봄
先驅者
너무도 슬픈 사실
새로운 都市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가로대
杜翁讚
哀想
밤車
그 누가 저 시냇가에서
여름 저녁 거리 우으로
曲馬團 風景
조선의 여인이여
가을
靑春·사랑
님을 그리움
失題
靑春頌
病床
街路燈 下 風景
그대
또다시 님을 그리움
舊作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海邊에서
近咏 片片
默想 詩篇
나는 不幸한 사람이로다
鄕愁
아침
나그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책상 우에 놓인 화초의 흰 얼굴 볼 때마다 그대 생각나기에
치우자 치우자면서도 이젯것 못 치웠네.
–<近咏 片片> 중에서
2.
그러나 울기만 하면 무엇이 되느뇨?
슬픈 노래하는 詩人이 무슨 소용이뇨?
光明한 아침 해가 비최일 때에
우리는 밖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아니뇨?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