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모윤숙(1909∼1990)은 시문학사에서 남성 시인들이 다루어 온, 국가와 민족이라는 주제를 노래한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던 해방 이전의 문단은 물론이거니와 시문학사 전체로 볼 때 민족과 국가의 노래는 남성 시인의 영역이며, 사랑과 슬픔의 노래는 여성의 노래라는 식의 젠더적 구분이 통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여성 시인에게 기대하던 바를 뒤집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와 시인의 독자성과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담론 안에서 사유하는 시인은 개인의 수난보다는 집단의 수난에 주목해 왔는데, 이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1970년대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장시의 창작에 주력했다. 1973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타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논개와 김시민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논개≫를, 1978년에는 삼국시대 신라의 선덕여왕과 백제 도공 아비지의 이야기를 다룬 ≪황룡사 구층탑≫ 등의 장편 서사시를 썼다. 그는 민족 위기의 서사를 통해 민족 분열로부터 통합을 보여 주고 국가적 민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서사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여성 시인의 역사적 서사시 창작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 시인으로서 모윤숙은 해방 전후는 물론 1970년대까지 정치적, 문화적 장(場) 안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줄곧 역사적 현실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자 한 시인이었다. 이처럼 민족과 국가라는 거대 담론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려 한 그의 문학 활동은 여성 시인의 존재론을 내면이나 텍스트로부터 현실과 역사로 확장한 의미 있는 실천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자평
노천명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여성시인의 대표 주자로 불리는 모윤숙. 독립을 염원하는 시를 쓰는가 하면 친일 행적을 보이기도 하고, 근대화와 여성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국제 로비를 통해 유엔에서 남한만의 정부를 인정받아 국가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아낙네란 이름 없이 왔다 가 버리는 이 나라”에서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큰 주제를 여성적인 열정으로 녹여낸 모윤숙의 작품을 초판본 그대로 만나 보자.
지은이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은 1909년 음력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아버지 모학수와 어머니 임마태 사이에서 2남 3녀 중 2녀로 출생했다.
1917년 모윤숙은 원산 진성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보통학교 3학년 때 숙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가족 모두 함흥으로 이사함에 따라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숙부의 도움으로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고 2학년 가을 학기에 편입해 1927년에 졸업한다. 학비와 기숙사비는 숙부가 부담했지만 용돈은 모윤숙 스스로 마련했다. 호수돈 여고 3학년 때 전국 YWCA 학생 하령회 대표로 서울에 와서 김활란 박사의 강의 <청년과 신앙>을 듣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조국의 현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한편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본어로 된 세계 문학 전집과 ≪개벽≫을 통해 김억, 주요한, 김소월 등의 시를 접하게 되고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27년 이화여전 예과 영문과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3학년 때에는 전교 학생회장, 기숙사 학생회장을 하면서 문학의 정열을 키워 갔다. 1929년에는 교지 ≪이화(梨花)≫를 창간해 편집부장을 맡아서 시와 소설, 논설 등의 많은 글을 ‘M’, ‘MYS’, ‘해송(海松)’, ‘윤숙’ 등의 필명으로 발표했다. 문학 외에도 연극에 관심이 많아 연극 <잔다르크>에도 출연했으며 4학년 때는 저항 정신과 여성 계몽 의식을 담은 <5년 후>라는 3막극을 졸업 연극제에 올렸다.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사 희망자가 없는 지역이지만, 조선말로 가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 영어 선생으로 부임한다. 이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요한의 청탁으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이후 지병인 기관지염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 1932년 배화여고 교사로 부임한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 생명을>, <조선의 딸 > 등을 발표해 김억, 김동환에게 격려를 받았으며, 춘원 이광수와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춘원은 모윤숙에게 ‘고개 위에 떠가는 구름’이라는 뜻의 ‘영운(嶺雲)’이라는 호를 지어 주고 첫 시집인 ≪빛나는 지역≫의 서문도 써 줄 만큼 사이가 각별했다.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여성 시집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조선이 가진 하나뿐인 여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첫 시집 출간 후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교류를 갖고, 극예술 연구회 회원이 되었으며, 순수문예지 ≪시원≫에 가입해 노천명과 함께 1930년대 주요한 여성 시인으로 활동했다. 1934년 7월 20일 춘원의 소개로 헤겔 철학을 전공한 철학박사 안호상과 결혼했다. 1936년 외동딸 안경선을 낳았고 해방 이후 별거를 하다가 1960년대에 이혼했다.
1935년 결혼 후,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 선과를 2년 수료하고, 경성중앙방송국에 취직해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방송 대본 등을 직접 맡았다. 1937년 서간문 형식의 산문시집인 ≪렌의 애가≫(1937)를 발간했다. 500부를 인쇄한 이 책은 닷새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1941년부터 ≪신시대≫, ≪매일신보≫ 등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과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시와 논설문 등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1947년, 시집 ≪옥비녀≫를 발간했고 박순천과 함께 여성운동을 했으며 유엔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9년 ≪문예≫지를 창간해 1954년 3월호까지 통권 20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이후 ≪ 현대문학≫의 전신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애국시 낭송 방송을 하다가 피난할 기회를 놓쳐 경기도 광주 근처에 숨어 있으면서 신분이 발각될까 봐 죽으려고 수면제를 먹기도 했다. 광주에 숨어 있던 중 국군의 주검을 보고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쓰게 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체험한 시편들을 모아 시집 ≪풍랑(風浪)≫을 간행했다. 1954년 1월에는 ≪렌의 애가≫가 국제 펜클럽의 심사와 추천을 거쳐 81개국에서 영역 출판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소련 유네스코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2월 한국 펜클럽 창립을 알선했다.
1955년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재직했고 한국자유문학협회 시 분과 위원장, 한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최고위원을 지냈다. 6월에는 초대 회장인 변영로, 김광섭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제7차 국제 펜클럽 비엔나 대회에 참석해 정식으로 펜클럽 인준을 받았다. 1959년 시집 ≪정경≫과 소설 ≪그 아내의 수기≫를 간행했다.
1960년 수필집 ≪포도원≫을 간행했고 5월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모란 훈장을 수상했으며 1965년에 예술원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상을 수상했고 시, 수필을 엮은 ≪얼룩진 미소≫를 발간했다. 1968년 수필집 ≪회상의 창가에서≫를 출간했고, 이화여자대학교가 수여한 문화공로상을 받았다.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시집 ≪풍토≫가 발간되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문화계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에 선임되어 문고위원의 일을 맡았다.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의 준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74년 서사시집 ≪논개≫를 발간했으며 한국현대시인협회 제3, 4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인준되었다. 1978년 ≪영운 모윤숙문학전집≫이 발행되었다. 1979년 서사시 ≪황룡사 구층탑≫으로 3.1 문화상을 수여받고, 세네갈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서사시 <성삼문>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80년 미국 뉴욕의 리치우드 출판사에서 ≪렌의 애가≫가 번역 출판되었다. 국제 펜클럽 활동을 하면서 엘리자베스 비숍, 로버트 프로스트 등의 시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987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90년 6월 7일 별세했고, 6월 8일 대한민국 금관문화상이 추서되었다. 1996년 ‘영운 모윤숙 문학 산실’의 문학비가 한남동 자택에 건립되었다.
엮은이
김진희는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 학위논문으로 일제 강점기 생명파 시문학의 근대성 문제에 천착한 이후 최근까지 식민지 시대 한국 근대문학의 젠더, 근대성, 탈식민성, 번역과 비교문학 연구 등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시에 관한 각서≫, ≪불우(不遇)한, 불휴(不朽)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 등이 있고 연구서로 ≪생명파 시의 모더니티≫(2003), ≪근대문학의 장(場)과 시인의 선택≫(2009)이 있으며 공저로 ≪오규원 깊이 읽기≫(2002), ≪새로 쓰는 한국시인론≫(2003), ≪행복한 시인의 사회≫(2004), ≪시대를 건너는 시의 힘≫(2005),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2009), ≪젠더하기와 타자의 형상화≫(2011) 등이 있다.
차례
이 生命을
그 꿈을 깨치소서
못 가오리다
봄 찾는 마음
默禱
그이가 오신다게
나오서요
銀河 노래
조선의 딸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
靑春의 노래
빛나는 地域
나를 잠재워 다오
우리들은 살았어라
해란江의 놀
검은 머리 풀어
이 긴 밤의 행렬
물 깃는 색시
永遠의 塔이 되라
이 맘을
푸른 寢室
三八線의 밤
옥비녀
출발
悲運의 樂師에게
菊花
장미의 말
잠든 눈
즐겨 부르던 내 노래야
무덤에 나리는 소낙비
어머니의 기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기다림
그대 눈으로
헤어진 뒤에도
달밤이 아니라도
天命에게
讚! 申師任堂
情景
河水로 간다
아폴로 寺院
해골의 廣場
喪失에서
동짓달
물의 音樂
창을 도로 닫으면서
歸路
風土
重患者室
밀물 썰물
국화 옆에서
九月 아낙네
머슴아야
어느 순간
生存
C 湖水에서
窓門
갈증
올리브 숲의 밤
논개_序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님이 부르시면 달여가지요
금띄로 裝飾한 치마가 없어도
眞珠로 꿰맨 목도리가 없어도
님이 오라시면 나는 가지요.
님이 살나시면 사오리다
먹을 것 매말나 倉庫가 비엿서도
빗덤이로 옘집 챗직 마즈면서도
님이 살나시면 나는 살어요.
죽엄으로 갚을 길이 잇다면 죽지요
빈손으로 님의 앞을 지나다니요
내 님의 원이라면 이 生命을 앗기오리
이 심장의 왼 피를 다- 빼여 밫이리다.
무엔들 辭讓하리 무엔들 안 밫이리
蒼白한 手足에 힘나실 일이라면
파리한 님의 손을 버리고 가다니요
힘 잃은 그 무릅을 바리고 가다니요.
●임 계신 곳 향하여
이 몸이 갑니다.
검은 머리 풀어 허리에 매고
불 꺼진 조선의 제단에
횃불 켜 놓으러 달려갑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짝이에
혼자 누어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지김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씨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였노라. 山과 골짝이, 무덤 위와 가시 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씨자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왔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쓰크바 크레므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少女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왔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너머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짝이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은 곳 이름 모를 골짝이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켈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르는 봄 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르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少女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달밤이 아니라도 좋지 않아요?
이렇게 걸어가고 있으면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이웃집 개가 가만히 치마를 간지리고.
어느 수수깡 大門 안
흰 빨래가 밤을 미소 짓는데
보이지 않는 풀잎들에서
먼 바람이 보내는 눈짓의 즐거움들
당신과 내가 흰 사랑에 아롱진
마음속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엔
달밤이 아니라도 좋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