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이찬의 시는 분단 시대 6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 문학사의 어느 장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매몰의 시간을 경험했다. 이는 우리 민족사에 어떠한 굴절과 은폐와 이질적인 것들이 존재했던가를 보여 주는 것인데, 그 과정은 민족주체성의 분열과 망각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제 비교적 제한된 폭이지만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과 문제 제기가 있고, 그의 작품의 전모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민족주체성을 잃어버린 일제 강점의 시대를 생각해 본다. 더불어 다시금 민족주체성 확립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모국어와 민족 문학의 모든 것들의 복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찬은 경성제2고보 4학년 재학 시절인 1927년 9월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46년 해방 직후 <피난민 열차>를 ≪중앙일보≫에 발표한 후 남한의 지면에서 사라져 북한에서 주요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한적인 식민지 상황의 30년대를 고스란히 그 속에서 살아야 했던 민족 성원과 개인으로서의 시인 이찬은 식민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찬의 고향 체험과 변방 지역 주민들의 삶의 모습은 가난과 추위에 시달리고 뿌리를 잃어버린 반인간적, 반민족적 식민지 상황에 더욱 대응되는 것이었다. 이찬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응은 우리에게 이미 반세기 동안 잊힌 북국의 풍경과 변방의 생활을 담은 시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 시절 국경 지역이라는 특수한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또 다른 위치에서 보여 주는 충실한 문학적 보고서이기도 하다.
우리 현대 시에서 향토 서정은 한국적 정서의 일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향토 서정이라 하면 김영랑을 대표로 하는 남도 서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방 토착민의 삶을 독특한 시어로 묘출해 낸 백석과 ‘침울한 북방의 정서를’ 남다르게 형상화한 이용악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북국 정서는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특히 백석은 식민지 시대에 모국어의 의미를 복원코자 했던 주체적 시정신을 평북 지방 방언으로 잘 드러낸 바 있다. 북방 정서는 김소월과 백석이 보여 준 평안도 정서와 한반도 최북단의 두만강 지역의 변방민의 삶을 표현한 이용악, 김동환의 시 세계로 크게 대별된다. 우리에게 북방은 잃어버린 민족의 일부이며 그리움의 지역이다. 지금 우리가 이찬의 시를 통하여 북방 정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남다른 뜻은 반세기 동안을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는 분단 때문이다. 때문에 이찬의 시 세계에 싱싱하게 나타나는 북방 지역의 독특한 정서는 현재의 말할 수 없이 위축되고 섬약해진 민족 정서를 강건하게 재구축하고 되살려 가는 일에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된다고 확신한다.
이찬의 시에 담긴 북방 정서는 침울한 북국의 정경 묘사와 유랑 체험을 통한 국경 지역의 삶의 애련을 담은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 세계는 북국의 차가운 대지 속에 민족 공동체를 희원하는 시인의 비감한 민족적 영감으로 일제 통치의 변두리에서 민족 언어를 통해 솟구쳐 오른 민족시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200자평
1930년대, 천하지대본이었던 농민은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국내에서 유리걸식하다 못해 만주로 시베리아로 흘러가 유망민이 되었다. 이 위기의 시대, 그 슬픔과 고난을 각색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으로 전한다. 슬픔은 북방의 거친 바람과 함께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된다. 민족의 고난과 비극의 역사를 인간적 연대로 심화시켜 간 민족 시인 이찬, 바로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 온 월북 시인의 이름이다.
지은이
이찬(李燦)은 1910년 함남 북청에서 출생했다. 아호는 무종(務鍾)으로, 북청공립보통학교, 경성제2고보를 거쳐 일본 릿쿄(立敎)대학, 와세다대학 노문학과, 연희전문 등을 다녔다. 일본 무산자사(無産者社)와 관계를 맺으면서 당시 도쿄에 와 있던 시인 임화(林和)를 만나 사귀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연맹 코프(KOPF)의 조선협의회에서 활동했고 귀국 후 가정교사, 경성중앙고보 교원 등을 거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다시 도일해 신고송(申鼓頌) 등과 함께 동지사(同志社)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다가 서울에 돌아와 카프(KAPF)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문학건설≫지 창간에 참여했다가, ≪별나라≫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석방 후 일제 경찰은 시인을 북청으로 강제 귀향시켰다. 생계를 위해 관납상회, 북청문화주식회사(인쇄소), 양조장 등에서 일했으며 시집 ≪대망(待望)≫(1937), ≪분향(焚香)≫(1938), ≪망양(茫洋)≫(1940), ≪해방≫(1945), ≪화원(花園)≫(1946), ≪승리의 기록≫(1947), ≪쏘련시초≫(1947), ≪리찬 시선집≫(1958) 등을 발간했다. 1946년 평양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뽑혔고 북한에서 ‘혁명시인’ 칭호를 받았다. 1974년 사망했다. 추모시선집 ≪태양의 노래≫(1982)가 평양에서 발간되었다.
엮은이
이동순(李東洵)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이다.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1973)와 문학평론(1989)으로 당선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문과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며,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한국인의 세대별 문학의식≫,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우리 시의 얼굴 찾기≫, ≪달고 맛있는 비평≫ 등을 발간했다. 편저로는 ≪백석시전집≫, ≪권환시전집≫, ≪조명암시전집≫, ≪이찬시전집≫, ≪조벽암시전집≫, ≪박세영시전집≫ 등을 발간했고,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철조망 조국≫, ≪아름다운 순간≫, ≪발견의 기쁨≫ ≪묵호≫등 14권을 발간했다.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5부작 10권) 완간했으며 산문집 ≪시가 있는 미국 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번지 없는 주막-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 권을 발간했다.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제1부 북관천리
밤차
북방의 길
떠나는 마을
북만주로 가는 月이
國境 一折
別後
月夜
北國 傳說
눈 나리는 堡城의 밤
北關千里
厚峙嶺
國境의 밤
白山嶺上 俯瞰圖
소묘·北國 漁港
北方圖
제2부 가구야 말려느냐
썰매
가라지의 설움
하얼빈
氷原
사막
茫洋
바리우는 이 없는 정거장
對岸의 一夜
가구야 말려느냐
면회
結氷期
滿期
邂逅
頌·아리나레
대망
제3부 조국이여!
동모여
이러진 花園
고향에 돌아와서
아편處
避難民 列車
祖國이여!
어머니
花園
鐘路 네거리에서
八·一五
三月 가까운 거리에서
窓을 열면
달과 딸과 어머니와
배낭
바리움
아오라지 나루
그 노래
어느 고지에서
현해탄
제4부 길을 열자
밝은 세월
기어이 가시려거던
즐거운 로력
용해공의 노래
어로공 금녀
붉은 兵士
원동 초원에서
쏘베트 병사
흘러라 보통강 노래처럼 그림처럼
千萬의 感激!
祝宴
진펄
그 사람들
힘
못할 일 있으랴
길을 열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가구야 말려느냐 가구야 말어
너는 너는 참 정말 가구야 말려느냐
이민이라 낼 아침 첫차에 실려
이역천리 저 북만주 가구야 말려느냐
아 잡아 보자 네 손길 이게 마지막이냐
이리도 살뜰한 널 내 어이 여의는가
야속하다 하늘도 물은 왜 그리 지워
너희네 부치든 논밭뙈기 다 빼낸단 말이냐
허드라도 행랑살이 내 집 살림 절박치 않다면
내 너를 보내랴만 꿈속엔들 보내랴만
아아 다 없고 황막한 그 땅 네 얼마나 쓸쓸하랴
철철 추위 혹독한 그 땅 네 얼마나 괴로우랴
사시장장 가여운 네 생각 내 어찌 견디리
자나 깨나 그리운 네 생각 내 어찌 배기리
●嶺이 嶺을 불러 밀어를 주받는 곳
길이 눈꼴 틀려 비꼬기만 하고
차는 갓 시집온 새악시같이
그 서슬에 옮겨 놓는 자욱도 조심 겨워…
북으로 칠백 리 나른한 여로에
시름은 조름인 양 살포시 안겨 드노니
아하 가도 가도 무거운 눈두던 거들어 주는 淸新한 풍경도 없고
가도 가도 막막한 가슴 열어 주는 浩闊한 田野도 없고
울고 싶다 이 울울히 ‘먹이 쫓는 북방의 길’이여
그러나 車輪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의무를 반복하는구나
●국경의 조그만 마을 으슥한 주점
주점의 샐녘 호젓한 뒷방
끄므럭이는 소남포 으스름한 등빛 아래 연달아 넘는 잠을 들고 또 들고
즐거워야 할 남은 밥도 한숨으로 지새든 애처로운 기억의 그 여인이여
생이별한 그 년석은 꿈에 기두려워도 아홉 살 난 중대가리 그 아이 생각
이렇게 눈 나리고 스산한 밤엔
의붓어미 등쌀에 웅크리고 덜덜 떨며 잠 못 드는 상싶어
잊으려도 잊으려도 미칠 듯싶다 미칠 듯싶다…
오 북국의 밤은 노을도 눈이 나리고
게다가 샛바람마저 이—잉 잉 휩쓸어 치고…
●알뜰히 수염 밀고 구두 닦으믄
八·一五부터 시작한 습성입니다
무어랄가 이렇게 기꺼운 일이
날마다 어드멘가 있을 것만 같고
일었다ㄴ 다시 눕는 아츰 버릇은
八·一五부터 저 머−ㄹ리 버리었습니다
누구ㄴ가 부르는 듯 기다리는 듯
마음 저절로 송구스러워—
만사 허허 허든 그런 표정도
八·一五부터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오다가다 생긴 일 하잖은 일도
진정 모다 내 일만 같고 소중만 하고
아 술 마히고 울어 보든 슲은 작란도
八·一五부터 깨끗이 잊었젔습니다
분헌 것 괴로운 것 아니꼬운 것
그도 저도 우리끼리의 잘잘못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