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한국 현대시사를 서술하는 책에서 박노춘과 함윤수, 두 시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예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함윤수는 활발한 작품 창작과 문단 활동에 비해선 문학사적 조명을 덜 받은 시인이다. 박노춘은 문학계에서 그보다는 더 널리 알려졌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로서 그의 명성과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박노춘을 기억하는 이는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아주 드물 것이다. 박노춘은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여정≫을 출간하기 전에 몇몇 지면에서 시를 발표하긴 했지만, 시집을 내기 전이나 낸 후에도 문단에 나와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박노춘과 함윤수의 시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면 몇 가지 공통점도 눈에 띄고 나름의 의의를 둘 만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시인의 시를 읽어 보면 무엇보다 시편들이 간결하고 단아한 단형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을 짚을 수 있다. 대부분 시편들이 10행을 넘지 않는데, 이러한 형식미는 두 시인의 시적 개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박노춘은 시편들의 분량이 적어 그 개성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함윤수는 후기 작품들에서도 절제되고 단정한 어조와 호흡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를 뚜렷한 시적 특질로 파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극도로 제약된 형식적 절제미를 시대적 맥락과 결부해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박노춘과 함윤수의 작품들은 대개 1930년대 중후반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주류 경향이었던 단편 서사시의 형태가 주춤하는 동시에 1930년대 후반 이후 청록파의 절제된 균형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바로 직전이다. 두 시인은 당시 이러한 시적 경향의 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시는 청록파의 시적 경향과 친화성을 보인다. 그러나 자아의 내면이 아주 축소되어 자연 자체가 전경화되는 청록파의 주제와 달리 박노춘과 함윤수의 시에서 모든 자연물은 서정적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로만 등장한다. 이러한 주제상의 차이가, 아마도 단형의 형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의도적으로 술어 사용을 자제하며 여백의 의미를 확장하려는 청록파의 기법과 달리, 박노춘과 함윤수의 시에서 자아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완결된 문장을 주로 사용하는 차이를 낳은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함윤수의 시를 되풀이해 읽다 보면 참신하고 깊이 있는 상징들을 해석하는 맛을 즐기게 된다. 또한 박노춘의 시를 읽으면 정갈하고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다소 낯선 두 시인, 함윤수와 박노춘의 시를 한자리에 모은 이 책에서 이러한 미적 취향의 어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지은이
박노춘(朴魯春, 1912~1999)은 1912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노강(蘆江),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이능구(李陵九)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43년 3월 일본 동경의 법정대학(法政大學) 고등사범부 한문과를 졸업했다. 1952년 천안공업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고, 같은 해 가세곡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5년 10월부터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취임했고 이내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1966년 2월 건국대학교에서 <회문체 시가 고찰: 언어·문자·유희 연구>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12월 국민교육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했다. <시조 창곡의 발생과 그 이칭>, <한국 신연극 오십년 약사>, <박씨본 ‘해동가요’의 자료적 가치>, <고전 주역 문제>, <시조 창곡의 최초 문헌> 등의 논문을 썼고, ≪주해가사문학전집≫, ≪한문숙어사전≫, ≪고시가주해≫ 등의 저서를 냈다. 성실한 자세로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시를 즐겨 쓰고 노래하는 시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후학 양성과 학회 조직에 힘쓰다 1999년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함윤수(咸允洙, 1926~1984)는 1926년 4월 1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출생했다. 호는 목운(牧雲)이다. 1938년 시 동인지 ≪맥≫의 동인으로 참여했고, 이 잡지의 창간호에 <앵무새>, <유성>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에 나온 ≪맥≫ 2호에 <너구리 같은 여인>을, 3호에 <말 못하는 앵무새>를 발표했다. 1939년 첫 시집 ≪앵무새≫(삼문사, 1939)를 출간했다. 이듬해 두 번째 시집 ≪은화식물지(隱花植物誌)≫(1940)를 도쿄의 장학사에서 출간했다.
해방 직후 최명익, 유항림, 전재경, 한태천, 남궁만, 김이석, 박남수, 황순원 등과 함께 평양에 거주하는 문학인과 예술인으로 결성된 평양예술문화협회의 멤버로 참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나 북한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한 뒤 <부취(腐臭)>(1953), <눈으로 말하고>(1955), <포위된 태양>(1958)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다. 이 시기에 제3시집 ≪사향묘(麝香猫)≫(중앙문화사, 1958)를 출간하고, 1965년에 ≪함윤수시선(咸允洙詩選)≫(중앙문화사)를 냈다. 상명여고와 청주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84년 숙환으로 안양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엮은이
차선일은 부산외국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태원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하며 근대 탐정소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능력 밖의 연구에 몰두하며 애를 먹고 있다. 이후로 문학의 범위를 벗어나 철학과 사회학 등 인문학 담론을 공부하면서 문학 연구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에서 민속학과 근대문학의 연결점을 찾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차례
<박노춘 시선>
밤
탱자
해바라기
琉璃窓
旅程
悲鳥
靜夜
追憶
激浪
밤車
證言
바다
가마귀
술네잡기
空想의 씨알
오막사리 風景
航笛
故鄕
海霧
부적
焦燥
미꾸리
지렝이
歸路
花甁
不如歸
핏방울
<함윤수 시선>
앵무새
별
꿈
그의 마음
츄−립
水仙花
病床에서
無題
너구리 같은 女人
밤
달(1)
달(2)
바닷가
박
不死의 偶像
祝宴
時間
밤
꿈
暗影
歷史
復讎의 女神
聖餐
葬送曲
偶像
薔薇
水仙花
腐爛
거머리
鼠公
花粉
밤
無名指
戱畵
包圍된 太陽
自動人形
距離
原罪
花蛇
女人
渄泄
月見草
눈동자
除夜
그리움
黃昏의 노래
이슬진 두 볼
흰곰
歌人
공포의 역사
生命地帶
神話
迷路
손톱
造物主의 장난
落葉
食人種
不渡手票
交叉路
無許可 建築
平行線
候鳥
늑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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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슬픔의 둥주리를 지어 놓고
달 밝은 밤이면 서러운 옛 노래를 부르는 새
내 마음이 텅 비인 때에도
내 마음이 목마른 때에도
내 마음이 외로운 때에도
내 마음이 즐거운 때에도
아리게 서러운 가락으로 옛 노래를 부르는 새
오오! 밤마다 시름겨운 내 마음의 빈터를 울려 주는 곻은 넋이여!
-박노춘, <悲鳥>,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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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記憶을 간직한 水仙花
싸늘한 哀愁 떠도는 寂寞한 침실
久遠의 搖籃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蒼白한 無名指를 裝飾한 眞珠 더욱 푸르고
永劫의 孤獨은 찢어진 가슴에 落葉처럼 쌓이다
-함윤수, <水仙花>,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