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1984년 등단한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 온 고재종 시인의 육필 시집.
표제시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을 비롯한 58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고재종
1957/ 전남 담양 출생
1984/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
1987/ 첫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실천문학사) 발간
1989/ 시집 ≪새벽 들≫(창작과비평사) 발간
1991/ 첫 산문집 ≪쌀밥의 힘≫(푸른나무) 발간
1993/ 시집 ≪사람의 등불≫(실천문학사) 발간, 제11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1995/ 시집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 발간
1996/ 산문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문학동네) 발간,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지냄), 계간 시전문지 ≪시와사람≫ 편집주간(지냄)
1997/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문학동네) 발간, 제2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2001/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 발간, 제16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2002/ 소월시문학상작품집 ≪백련사 동백숲길에서≫(문학사상사) 발간
2004/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 발간
2005/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들≫ 편집주간(지냄)
2008/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광주전남지회장(지냄)
2011/ 산문집 ≪그리움의 발견≫(공저, 좋은생각) 발간
차례
자서 7
제1부
흑명(黑鳴) 10
독학자 12
지하생활자 16
길의 길 20
고요를 위하여 24
정자에서 26
뱀에게 스치다니! 28
첫사랑 32
시린 생 34
장엄 36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38
은어 떼가 돌아올 때 42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46
상처의 향기 50
세한도 52
동안거(冬安居) 56
전각(篆刻) 58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60
연비(聯臂) 64
제2부
수선화, 그 환한 자리 70
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72
면면(綿綿)함에 대하여여 78
그 희고 둥근 세계 82
들길에서 마을로 86
수숫대 높이만큼 90
무명연가(無明戀歌) 92
은행나무길 94
한가함을 즐기다 98
직관 102
날랜 사랑 104
파안 106
들길 108
텅 빈 충만 112
가난을 위하여 116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 120
분통리의 여름 124
출렁거림에 대하여 128
그 순간 130
제3부
사람의 등불 134
세모의 눈 136
곗집 138
청상 140
부신 햇살 속 142
달마중 144
밤꽃 피는 세상 그려 148
낫질 152
빈 들 156
설움에 대하여 160
세한 162
얼굴들 164
대숲이 부르는 소리 168
추석 172
딸기빛 처녀 176
흰 머리 180
보성댁의 여름 184
귀가 188
조약돌 한 개 192
시인 연보 197
책속으로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으로 환하다. 산제비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초로(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외로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비잠(飛潛) 밖으로 멀어지듯 요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윤기 흐르는 까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일월(日月) 너머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단단하겠다. 바람이 분다. 천리향 향기가 싱그럽다. 너는 그렇게 향기부터 보내오리라. 하면 거기 굼뜬 황소마저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렇게 아득하겠다. 그 향기 아득한 것으로 먼 곳을 보면, 삶에 대하여 무얼 더 바래 부산해질까. 물결 잔잔해져 수심(水心)이 깊어진다. 나는 네게로 자꾸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