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언어와 고통이 낳은 시의 불완전성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는 최규승 시인의 육필시집.
표제시 <시간 도둑>을 비롯한 38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최규승
1963/ 경남 진주 출생
2000/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
2006/ ≪무중력 스웨터≫(천년의시작) 출간
2012/ ≪처럼처럼≫(문학과지성사) 출간
차례
시인의 말
걸어간다
고통
공사 중
귀향
그림자놀이
노을의 시간
데칼코마니
멸치
몰라
무중력 스웨터
바라본다
반지를 잃다?
책속으로
시간 도둑
밤의 색깔이 걷히지 않았으면
이불의 구김과 티셔츠의 목선이 서로 감겼으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이 천천히 떠올랐으면
시집에 밑줄이 죽죽 그어져 이어졌으면
헝클어진 신발들이 가지런해지지 않았으면
선풍기 날개가 멈추지 않았으면
창을 넘어 들이닥친 바람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으면
꽃들이 뚝뚝 목이 꺾여 화단 모퉁이에 쌓였으면
테니스코트 녹색 천막에 형광색 공들이 퍽퍽 박혔으면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으면
시곗바늘은 그대로인 채 시계만 빙빙 돌았으면
가끔 꽥꽥 소리 지를 때 현관문이 덜컹 열렸으면
화분의 물기가 영원히 마르지 않았으면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3분 25초에서 바늘이 계속 튀었으면
체중계의 눈금이 멈추지 않았으면
수술대 위의 열린 가슴이 닫히지 않았으면
그 속의 심장이 영원히 멈추지 않았으면
시인의 말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 대서소가 꽤 많았다. 관공서가 모여 있는 도심과 학교 근처뿐만 아니라 동네에도 하나 정도는 지금의 문방구처럼 대서소가 있었다. 큰 대서소에는 젊은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서는 대개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이른 이의 일이었다. 이들은 오른팔에 토시를 끼고, 매우 진지하고 긴장된 자세로 손목을 신중히 움직여 글씨를 써 나갔다. 아직 글자도 배우지 못한 어린 내게도 그이들의 하얀 손목이 여간 멋있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대서소에 한 번도 일을 맡겨 보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다. 서류뿐만 아니라 관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문서, 심지어는 가정 통신문의 회신도 모두 아버지의 차지였다. 그래서 종종 아버지 대신 내가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내가 쓴 것처럼 우쭐해져서 반 친구들을 자신만만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나는 아버지의 필체를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버지의 사인까지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서 아버지는 더 이상 가정 통신문의 회신을 작성할 수 없었다. 도장보다는 사인을 선호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성적이 떨어져도 걱정이 없었다. 성적표의 학부모 확인란은 이때부터 내 차지였다. 자신을 얻은 나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대필해 주고 있었다.
어느새 내 글씨는 은밀한 편지를 벗어나 벽을 장식하게 되었다. 손이 붓고 어깨가 아파도 대서의 날은 계속되었다. 대자보판 앞에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 때는 아픈 어깨도 금세 낫는 듯했다. 가끔 공연 포스터에 쓰일 글씨를 부탁받을 때는 반듯함을 넘어서 한껏 멋을 부려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애써 써 붙인 대자보가 비에 젖거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훼손됐을 때보다 더 의기소침해졌을 때는 사람들이 외면할 때였다. 그때의 가슴 아픔이란….
다시 작은 글씨로 은밀한 글씨를 써 내려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김수영, 이성복, 김혜순, 오규원 등의 시를 옮겨 적으며 온전히 나만을 위한 필사를 해 나갔다. 이미 세상에서 대서소가 사라지고 컴퓨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시(詩)도 자판으로 ‘치는’ 시대가 왔으므로 ‘대서의 시절’은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손으로 몸으로 익히는 시가 머리로 익히는 시보다 훨씬 강렬했으므로 나는 필사를 멈추지 않았다.
시인들의 시를 적은 대여섯 권의 다이어리를 그녀에게 선물하고 나는 시인(詩人)이 되었다. 이제 다시 내 시를 옮겨 적는다. 필경사의 마음으로 대서소의 그이들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내 시이지만 내 것이 아닌 시(詩). 그런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시는 ‘시(詩) 쓰기’라는 형식으로 ‘시(詩) 하기’의 내용을 채워 나간다. 아무리 자판을 두드려도 시는 쓰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시인(詩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