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본 책에서 소개하는 튜체프 역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러시아 시인이다. 하지만 튜체프는 러시아와 그 영혼을 노래한 주옥같은 작품을 쓴 기라성 같은 러시아 시인의 한 사람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진 푸시킨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푸시킨에 버금갈 정도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고 읽히는 시인으로 러시아 낭만주의 시기를 풍미했던 대표적 시인이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튜체프는 많은 시들을 썼다. 그중 <침묵(Silentium)>(1830), <당신이 상상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Не то, что мните вы, природа)>(1836), <밤바람이여, 무엇을 울부짖는가?(О чем ты воешь, ветр ночной?)>(1836) 등이 그의 대표적인 시들로 꼽힌다. 튜체프의 시에서 자연은 가장 중요한 소재이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명상과 성찰이 튜체프 시의 핵심적인 테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인간적 현존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일명 자연시로 불리는 튜체프의 시는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러한 가운데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튜체프의 시를 ‘철학시’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시로 <환상(Видение)>(1829), <대양이 지구를 감싸듯…(Как океан объемлет шар земной…)>(1830), <낮과 밤(День и ночь)>(1839)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시들의 핵심 주제는 계몽주의 사상이 천명하는 이성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튜체프는 이성을 인식 영역의 원동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며, ‘차가운 이성’을 감성의 우위에 두지 않는 자신의 철학적 태도를 표출한다. 달리 말하면 이성에 의한 논리와 합리에 기초한 인간의 인식적 능력보다 ‘직관’에 의한 인식적 능력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직관에 대한 튜체프의 철학적 관점은 시에서 ‘무의식’이나 ‘꿈’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튜체프의 시는 자연시 혹은 철학시라는 특징 이외에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로도 유명하다. 그 사랑의 시들은 ≪데니시예바 선집≫이라는 계열적인 시로 독립해 구분되기도 한다. 이 선집의 시들은 데니시예바(E. Денисьева)와의 사랑이 준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튜체프의 죄의식을 주요 화두로 삼고 있다. 사랑을 ‘운명적인 결합이며 운명적인 투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튜체프의 사랑에 관한 시들은 현재까지 사랑을 노래한 러시아시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튜체프 자신은 스스로를 탁월한 시인으로 인정하기를 꺼렸지만, 그는 당대의 시인들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에 시문학을 주도했던 상징주의 시인들의 스승이자 우상이기도 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한 튜체프의 시에 나타난 철학적 상징들과 이미지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시 세계를 탐독하고 답습하고자 했다. 상징주의자들에게 튜체프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위대한 시인이며, 철학자이자 예언자였다.
현대에도 튜체프의 시는 러시아 시를 아는 첫걸음이 되고 있으며,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러시아의 어린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러시아 시인 중의 한 명이다. 물론 러시아 문학 교육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지는 러시아 작가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번역에 사용된 원문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나우카(Nauka) 출판사에서 1966년 출판된 ≪튜체프 시 전집≫이다. 본 번역문에 실린 82편의 시들은 19세기 러시아 시를 통합하는 다양한 시 선집에 포함된 시들을 우선적으로 선정하는 기준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원문으로 읽어야만 음미할 수 있는 러시아 시의 운율이나 압운을 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고자, 시가 전하는 철학적 내용이나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번역했음을 밝혀 둔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자, 자연시, 철학시, 사랑시의 대가, 러시아의 영혼을 노래한 시인 튜체프.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주옥같은 작품을 모았다. 그가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지은이
표도르 튜체프는 1803년 모스크바 근교 옵스투그에서 오래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옵스투그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서 보냈다. 그의 가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입각한 지주의 풍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튜체프는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튜체프 자신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그의 가정교사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유명했던 라이치(C. E. Raich, 1792∼1855)였는데, 라이치는 튜체프에게 고대문학과 고전 이탈리아 문학을 탐독하게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튜체프는 라이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로마시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그 시를 모방한 시를 쓰기도 했다. 1819년 튜체프는 모스크바대학의 문학창작부에 입학했다. 이때 그는 포고딘(M. Погодин), 셰비레프(С. Шевырев), 오도옙스키(В. Одоевский)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 결과 슬라브주의자로서의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튜체프는 학업에 정진하면서도 많은 시를 썼다. 하지만 튜체프는 학업을 마치자 뮌헨에 있는 러시아 공관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러시아를 떠난다.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뮌헨에서 튜체프는 소신 있는 외교관이자 문학 애호가로 알려지면서 사교계의 주요 인물이 된다. 이때 그는 셸링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게 되면서 독일 낭만주의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하이네와는 절친한 친구였다. 튜체프는 하이네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네 외에 실러와 괴테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이 당시 튜체프가 쓴 자작시들은 <망원경>, <북방의 선율>이라는 러시아 잡지에 종종 실리기도 했다. 1826년 튜체프는 페테르손(E. Peterson)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튜체프는 다른 여자와 몇 번의 로맨스를 가짐으로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그중 데른베르크(E. Dernberg)와의 로맨스는 크게 물의를 일으켜 결국 뮌헨에서 토리노로 좌천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튜체프는 1838년 첫 번째 아내가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배의 침몰로 인해 사망하자 데른베르크와 재혼하고자 했다. 이때 튜체프는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스위스로 갔고, 그 결과 외교관으로서의 자격마저 박탈되기도 했다. 그 이후 몇 년간 독일에 머물러 있던 튜체프는 1844년 러시아로 귀환했다. 그리고 1843년부터 러시아와 서구에 대한 저술에 전념했다. 그 저술에서 튜체프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 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니콜라이 1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황제는 튜체프를 다시 관직에 복귀시켰다. 1848년 튜체프는 페테르부르크 외무부에 특채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서적 검열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튜체프는 곧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박식함, 노련한 대화술 등은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시 역시 새롭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850년 <현대인>에 튜체프의 시는 다시 게재되었다. 이와 더불어 네크라소프(Н. Некрасов)의 비평도 실렸다. 네크라소프는 자신의 비평에서 튜체프를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에 견줄 만한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했다. 이후 투르게네프(И. Тургéнев)의 주선으로 튜체프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 역시 튜체프를 러시아 최고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1850년은 튜체프의 일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때 그는 거의 딸과 비슷한 나이인 데니시예바(E. Денисьева)를 만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데니시예바와의 사랑은 사교계의 큰 가십거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데니시예바는 자신의 가문에서 축출되기까지 했다. 데니시예바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튜체프를 사랑하는 대가를 처절하게 치러야 했으며, 1864년 짧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데니시예바가 죽고 난 후 튜체프는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았으며, 데니시예바를 향한 그리움과 죄의식을 시로 풀어냈다. 러시아에 머물 수 없어서 1년간 외국에 머물기도 했다. 방황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슬픔을 경험해야 했다. 데니시예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아이가 죽었고, 어머니와 유일한 동생이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아우에게… (Брат, столько лет сопутствовавший мне…)>(1870)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튜체프는 이미 자신의 삶도 거의 끝났음을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3년 후, 1873년 6월에 사망했다.
옮긴이
이수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 대학원 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과학아카데미 산하 문학연구소 ‘푸시킨스키 돔’에서 <튜체프의 자연철학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지대학교에 출강 중이며, 역서로 ≪튜체프 시선집≫, 논문으로 <포스트소비에트 여성문학에 나타난 고통과 구원의 시학>과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밤’ 고찰> 등이 있다.
차례
봄의 뇌우
숨바꼭질(Cache-Cache)
여름 저녁
환상
불면
산속의 아침
눈 덮인 산
마지막 재앙
저녁
정오
*대양이 둥근 대지를 감싸듯
*둥근 하늘이 애처로이
평온
실성
*무릎까지 빠져드는 모래를 뚫고
가을 저녁
잎사귀
*이날을 나는 기억하오, 나에게
말라리아(MAL’ARIA)
봄물
침묵(Silentium!)
*뜨거운 재 위로
봄이 주는 평안
*인간의 숭고한 나무
문제(Probleme)
스칼드의 하프
*나는 루터교의 예배를 좋아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나는 기억한다. 황금빛 시간을
*밤바람이여, 왜 울부짖는가
*폭풍 전야처럼
*버드나무여! 왜 그리 냇가에
*안개 깔린 음산한 저녁
*관은 이미 무덤 속에 내려지고
*이른 새벽, 새처럼
*포도밭 언덕 위로
*사색에 잠겨 홀로 앉아
*겨울은 이유 없이 화를 내지 않는다
*정녕, 당신에 대한 사랑을
*달콤한 단잠에 빠진 짙은 초록의 정원
*회청색의 그림자가 하나가 되었다
*거칠고 험한 계곡
*들판에서 날아오른 매
분수
*영혼은 별이 되고 싶었다
*자연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대지는 황량한데
*너의 눈빛에는 감정도 없다
*보라, 석양빛으로
낮과 밤
*믿지 말라, 여인이여, 시인을 믿지 말라
*아직도 그리움에 사무치네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이렇게 다시 너와 만났구나
*고요한 밤, 늦은 여름
*인간의 눈물, 인간의 눈물이여
*사보이의 사랑스런 전나무를
러시아의 딸들에게
시
로마의 밤
*향연은 끝나고 노랫소리 사라졌다
*주여, 위로해 주소서
*조용하고 어두운 곳
*정죄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두 목소리
*보아라, 해빙하는 강변에
*오,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사랑하고 있는가
*죄악으로 병든 내 영혼이
*여인이여, 당신은 나의 고백을 수없이 들었소
우리 시대
*이별에는 고귀한 의미가 있다
숙명
*믿지 마라. 그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사랑을 위한 간절한 너의 기도
*그 눈동자를 기억한다, 오, 그 눈빛
쌍둥이
마지막 사랑
*이 가난한 마을
*그녀는 바닥에 앉아
*그녀는 온종일 몽롱한 의식 속에 누워 있었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K. B.
*진노하는 신은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주의 침묵이 주는
시간의 깊은 탄식,
예언과 이별의 음성 한가운데
우리 중 누가 외롭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