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간이집≫은 최립이 편찬한 원고를 바탕으로 1631년(인조 9년) 교서관에서 9권 9책의 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이때 운문을 앞에 실었던 당시의 문집 구성 방식과 달리 최립의 공의(公議)를 반영해 산문을 앞에 배치한다.
고려 후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정치나 사회뿐만 아니라 사유와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어려서부터 송대(宋代)의 성리학서를 읽고 자랐고, 이른바 문장가라고 하는 이들 역시 당송문만 익혔다. 또한 16세기 후반까지 문학 하면 곧 시만을 의미했을 뿐 산문의 문학성에 대한 인식은 형성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뛰어난 산문 작품을 남긴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문의 문학성에 대한 구체적 논의나 의식적 실천이 수반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최립의 산문은 문단에 선풍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송의 문장으로부터 선진(先秦)의 고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적을 철저히 익히고 녹여낸 그의 글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함과 난해함, 고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이란 모름지기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진부한 문장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이정표처럼 여겨졌다. 과감한 생략과 도치, 풍부한 비유와 인용으로 넘쳐난 그의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도록 강요했으며, 그 지적 유희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했던 독자들은 마치 낯선 세계에 발은 들여놓은 나그네처럼 긴장과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최립의 글은 숙종 때 편찬된 관찬선본인 별본(別本) ≪동문선(東文選)≫은 물론 서유비(徐有?)가 편찬한 ≪동문팔가선(東文八家選)≫, 송백옥(宋伯玉)의 ≪동문집성(東文集成)≫, 남공철(南公轍)의 ≪사군자문초(四君子文?)≫, 홍길주(洪吉周)의 ≪대동문준(大東文雋)≫ 등 사가(私家)의 선집에도 고루 수록되었다. 또한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안석경(安錫儆)을 비롯해 여러 고문가들의 논평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중국의 문장을 주로 다루어왔던 당시의 정황에 비춰보자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최립의 글은 문체나 수사 등 형식미 못지않게 내용상으로도 훌륭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은 외교문서는 그저 하나의 글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최립은 오해와 의심, 견제와 반목이 횡행하던 정국에서 민감한 현안을 간단명료하게 전하고 설득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글은 당대의 사유와 가치관을 정교하게 반영한 수준 높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글이란 무엇인가’,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고민한 조선의 명문장가 최립. 당송문(唐宋文)만을 익혔던 시대, 시(詩)만을 문학으로 취급했던 시대에 문단의 흐름을 바꾼 최립의 산문. <간이 산문집>에 최립의 산문 33제 34편을 실었다.
지은이
최립의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간이당(簡易堂)이다. 아버지는 최자양(崔自陽),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며,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결혼해 아들 동망(東望)과 딸 하나를 두었고, 서자로 동문(東聞)과 동관(東觀)이 있다. 1561년(명종 16년) 23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장연(長淵)·옹진(甕津) 현감과 재령(載寧) 군수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질정관으로 첫 번째 사행에 나섰으며, 귀국 후 재령 군수로 재차 부임했는데, 이때 해주(海州)에 은거 중이던 이이와 교유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원병을 청하는 문서를 짓는데 능문자(能文者)가 필요하다는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주청사(奏請使)로 임명되었지만 직책에 걸맞지 않다 해서 부사(副使)의 신분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지은 글들이 중국 관료들로부터 크게 칭찬받았지만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끝내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1596년부터 1602년까지 간간이 안변 부사(安邊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등의 외직을 얻어 나가기도 했으나 주로 승문원 제조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전담했다. 개성에 우거했을 때는,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서(書)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2세 때는 평양으로 옮겨 간이당(簡易堂)을 짓고 머물렀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 9책이 있으며,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과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십가근체(十家近體)≫ 등을 편찬했다.
옮긴이
김우정은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뒤,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더 잘 알려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에게 사사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조의 문체정책과 문학론 연구>로 석사 학위를, <간이 최립 산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 편찬원으로 근무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을 마쳤다. 2012년 현재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교 시절 읽은 적벽부(赤壁賦) 한 구절과 조부의 유품 속에서 찾은 ≪대학(大學)≫의 글귀에 매료되어 한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과 중국의 한문 산문이 지닌 문학성을 탐구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한문 산문을 분석하고 이와 관련된 여러 비평 자료를 검토하면서 고전이 오늘날까지도 공명하는 무한한 이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다. 한·중의 명편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과 이론과 창작 양 방면이 공평하게 고려된 새로운 한문 산문사를 집필하는 일이 최근의 관심사이며, 한자와 한문을 올바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강한 황경원의 고문론>, <월정 윤근수 산문의 성격>, <15세기 기서문의 성격과 의의>, <조선 중기 복고적 산문의 두 경향>, <유몽인 산문에 있어서 자득의 의미와 실현양상>, <선조·광해 연간 문풍의 변화와 그 의미>, <허균 산문의 연구>, <대학 교양 한자 교육의 현황과 과제>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 ≪국역 치평요람≫, 저서로 ≪최립 산문의 예술 경계≫가 있다.
차례
제1부 학문의 길, 문학의 길
박 수재와 헤어지며 남기다 留別朴秀才序
평양에서 판각한 《맹자》 대문의 발문 平壤刻板孟子大文跋
오 수재에게 주다 贈吳秀才序
양현사의 기문 兩賢祠記
고산구곡담의 기문 高山九曲潭記
여 장로 시권의 서문 如長老卷序
습재 권벽 시집의 서문 權習齋詩集序
사명을 받들어 중국에 가는 박 첨추를 전송하는 시서 送朴僉樞子龍奉使赴京師詩序
제2부 서화(書畵)에 담긴 뜻
<삼청첩>의 서문 三淸帖序
<낭간권>의 서문 琅간卷序
한경홍 서첩의 서문 韓景洪書帖序
<산수병>의 서문 山水屛序
퇴계의 글씨를 붙여 만든 작은 병풍에 쓰다 退溪書小屛識
이아계가 시를 써넣은 산수도에 쓰다 李鵝溪題詩山水圖識
관동 지역의 승경을 시와 그림으로 엮은 책의 발문 關東勝賞錄跋
하대이의 대나무 그림에 쓰다 河大而화竹識
금계수가 소장한 산수도에 쓰다 錦溪守所有山水圖識
이 소윤이 소장한 옛 그림에 쓰다 李少尹所有古화識
제3부 전쟁의 상흔과 관리의 도리
권 원수가 행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비문 權元帥幸州碑
유 원외에게 사례하는 자문 咨謝劉員外
도총섭 엄 상인에게 준 시서 贈都總攝嚴上人詩序
표설 豹說
호남 관찰사로 가는 구 감사를 전송하는 글 送湖南具監司序
영남 관찰사로 가는 허초당 선생을 전송하는 글 送許草堂先生觀察嶺南序
도체찰사의 막부로 가는 이 응교를 전송하는 글 送李應敎赴都體察使幕府序
호서에 시관으로 가는 정랑 이자민을 전송하는 글 送李正郞子敏湖西試官序
제4부 인생의 뒤안길에서
열승정의 기문 閱勝亭記
금강산을 유람하며 엮은 권첩의 서문 遊金剛山卷序
<징영당십영>의 서문 澄映堂十詠序
고사리 진소에 부임하는 송 첨지를 전송하는 글 送宋僉知赴高沙里鎭序
<춘천별어첩>의 발문 春川別語帖跋
고 고려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 남공의 묘표 故高麗通憲大夫樞密院直副使南公墓表
절필문 絶筆文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문장의 도를 이루려면 어찌하여야 하겠는가. 옛사람과 같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옛사람과 똑같이 하려고만 한다면 문장의 도(道)에 가까움을 보기에 부족할 것이다.
2.
말세의 습속은 귀로 얻어들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천시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풍속은 지위와 명망으로만 저울질하니, 비록 경홍의 글씨로도 간혹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경홍은 물론 속으로야 흔들림이 없었겠지만, 겉으로는 승복하는 시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일찍부터 경홍을 위해 이러한 세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이 경홍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기 때문에 제멋대로 비평을 가했던 것인데, 가령 경홍이 왕우군의 글씨를 임서한 것을 금석(金石)에 새겨 섞어 전한다면, 과연 이를 가려낼 자가 있을까. 대개 “눈빛만 스쳐도 도의 소재를 아는” 경우를 제외하면, 반드시 양자운과 같은 이를 기다려서야 알게 되는 문장의 오묘함과는 애초 같지 않은 것인데도 언제나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니 또한 이상하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