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과학사와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서양의 역사에서 과학과 철학이 활발하게 상호 작용하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대의 철학자들(대표적인 예로 아리스토텔레스)은 철학자이자 동시에 과학자였으며, 근대를 대표하는 과학자인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뉴턴 역시 ‘자연철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고도로 전문화한 19세기 이후부터 과학과 철학은 서로 분리되어 이제는 더 이상 두 학문 사이에 유의미한 상호 작용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이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저자인 라이헨바흐는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물리학 이론인 양자역학을 ‘피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적으로 유의미하면서도 과학자들 역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결론들을 도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에도 과학과 철학이 서로 협력하며 생산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의 활발한 상호 작용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 그다지 조예가 없는 사람들도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과학 지식만 갖고 있으면 이 책의 1부를 읽을 수 있으며, 이 책의 1부에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장이 담겨 있다. 2부는 양자역학의 수학 이론의 핵심을 개관하며, 2부의 논의는 3부에 이어지는 세부적인 분석의 토대가 된다. 이 책의 3부에서는 1, 2부의 논의를 토대로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당시에 큰 논쟁거리였던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역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주장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시중에 알려져 있는 일반적인 과학철학 저서와 달리 양자역학이라는 특정한 과학이론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나 양자역학을 배웠으며 여전히 그 철학적 기초에 흥미를 갖고 있는 과학도들이 읽기에 좋은 책이다. 양자역학의 철학을 다루고 있는 서양서들은 많으나, 국내에서 출판된 책들 중에는 양자역학을 철학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한 책을 찾기 어렵다.
이 책은 양자역학의 언어에 적용되는 논리 규칙이 이가논리가 아닌 삼가논리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양자역학을 다루는 일반 저서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점이다. ‘다가논리학(multi-valued logic)’을 과학이론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철학적 입장을 개괄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의 1부와 3부를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의 1부와 3부는 상대적으로 수학적인 내용이 적은 편이라, 대학교 초년 수준의 수학과 물리학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2부를 읽는 독자들은 2부의 양자역학 이론이 최신의 양자역학 이론과 다소 상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이 1944년에 나왔음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서 등장하는 전개 방식이나 표기법이 2014년 현재에 비해 다소 구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의 정확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자인 라이헨바흐는 전문적인 물리학자와 더불어 책의 수학적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200자평
20세기 물리학을 대표하는 양자역학에 대한 정밀한 철학적 분석
양자역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어떤 함축을 갖는가? 이 책은 유럽에서 ‘논리경험주의’를 이끌었던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가 양자역학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저술이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양자역학의 언어에 적합한 논리는 무엇인지를 살핀다. 라이헨바흐의 이 논의는 폰 노이만의 저작과 더불어 양자역학의 철학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이 물리 철학의 고전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지은이
한스 라이헨바흐는 189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당시 독일의 학문 수준은 서양 문화권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철학, 수학, 물리학 등에서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고 있었으며, 수학자와 물리학자를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주제가 갖는 철학적 의의에 대해 토론하는 데 거부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라이헨바흐는 이와 같은 활발하고 진지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베를린대학, 괴팅겐대학, 뮌헨대학 등을 거치며 수리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등의 지도 아래 수학, 물리학, 철학을 연구했다. 라이헨바흐는 당대의 자연과학자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나누며 베를린대학을 중심으로 이른바 ‘논리경험주의’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라이헨바흐는 철학이 사변적인 개념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동의하며 상호 협력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치로부터 추방되기 전까지 라이헨바흐는 베를린대학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에 적용할 수 있는 확률이론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당시 뜨거운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진행했다. 나치의 정치적 압력을 피해 1933년부터 터키의 이스탄불대학 철학과 학과장을 5년간 맡은 라이헨바흐는, 이 시기에 자신의 고유한 확률이론과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이러한 작업의 결실은 그의 ≪확률론≫, ≪기호논리학 기초≫에 담겨 있다. 미국 철학자 찰스 모리스(Charles Morris) 등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193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철학과에 재직하게 된 라이헨바흐는, 1953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철학적 탐구를 진행했다. 그는 확률이론, 기호논리학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철학 분야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간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과학이론이었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면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유의미한 철학적 귀결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라이헨바흐가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을 분석함으로써 얻은 철학적 결론들과 주제들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연구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옮긴이
강형구는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동네에 있는 금정산을 등산하며 자연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으며, 중학교 3학년 때 자연을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200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 서양철학과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2005년에 학부를 졸업한 후 강원도 홍천에서 육군 통신장교(학사장교 46기)로 근무하면서도 주말이면 틈틈이 홍천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과학철학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역 이후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논리경험주의자인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을 연구해 2011년에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 제목은 <라이헨바흐의 구성적 공리화?그 의의와 한계>였다. 석사 학위 이후 현재까지 교육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계속 공부하고 있다. 논리경험주의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모리츠 슐릭(Mortiz Schlick),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한스 라이헨바흐 등과 같은 논리경험주의의 핵심 인물들이 구축한 인식론적 성과가 철학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다. 전자메일 주소는 hgkang82@hanmail.net이다.
차례
머리말
1부 일반적 고찰
1절 인과 법칙과 확률 법칙
2절 확률 분포
3절 미결정성 원리
4절 관측에 의한 대상의 교란
5절 관측되지 않은 대상들의 결정
6절 파동과 입자
7절 간섭 실험의 분석
8절 완전한 해석과 제한적 해석
2부 양자역학의 수학 개관
9절 직교 집합을 이용한 함수의 전개
10절 함수 공간의 기하학적 해석
11절 역변환과 반복변환
12절 다변수 함수와 배위 공간
13절 드브로이 원리로부터 슈뢰딩거 방정식의 유도
14절 물리적 개체의 연산자, 고유함수, 고유값
15절 교환법칙
16절 연산자 행렬
17절 확률 분포의 결정
18절 ?함수의 시간 의존성
19절 다른 상태함수로의 변환
20절 관측을 통한 ?함수의 결정
21절 측정의 수학 이론
22절 확률 규칙과 측정에 의한 교란
23절 양자역학에서 확률과 통계적 집합의 본성
3부 해석
24절 고전적 통계와 양자역학적 통계 비교
25절 입자 해석
26절 사슬 구조의 불가능성
27절 파동 해석
28절 관측적 언어와 양자역학적 언어
29절 제한적 의미를 통한 해석
30절 삼가논리를 통한 해석
31절 이가논리의 규칙
32절 삼가논리의 규칙
33절 삼가논리를 통한 인과적 변칙 금지
34절 관측 언어의 미결정성
35절 측정의 한계
36절 서로 연관된 계
37절 결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든 종류의 관측에 의한 교란은 곧 물리적 장치들과 그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의 용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의 언어가 가진 명료함과 정확함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철학적 사변을 지지하는 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들은 과학에 대한 분석과 기호논리학을 통해 발전한 과학적 철학의 영역 내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