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체호프 아동 소설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호프의 아동문학을 이해해야 하며, 체호프의 아동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동문학의 보편적 특징과 러시아에서 아동문학의 위상, 그리고 체호프의 소설적 특징을 두루 이해해야 한다. 체호프는 아동문학 전문 작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아동에 대한 관심과 아동을 교육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늘 갖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을 글로 담아 낸 것이 체호프의 아동문학이다. 그러나 체호프의 아동문학은 그의 문학적 특징과 연계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의 아동문학에는 사건의 빠른 전개보다는 서정성과 심리묘사가 두드러진다. 그 결과 대체로 아이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작품들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상황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묘사되는 상황에서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심리가 잘 드러나는 부분도 있지만, 아이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기도 한다. ‘아이-사회’, ‘아이-어른’ 등의 대립이 해결책 없이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 나는 상황을 보여 줄 테니까 독자 여러분은 열심히 읽고 스스로 고민하기 바란다. 체호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체호프의 아동문학에는 내용과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를 전제로 하고 체호프의 아동문학을 구조적 특징상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면서 ≪체호프 아동 소설선≫에 소개된 작품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먼저 동물들을 의인화한 작품들이 있다. 기존에 번역된 <카슈탄카(Каштанка)>(1887)와 여기에 소개된 <하얀 이마>(1895)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우리가 아동문학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가장 적합한 모습이다. <하얀 이마>는 “어린이를 위해 쓰고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처음이자 유일한 단편이다”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보듯이 체호프가 작정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위한 문학 그리고 어린이의 문학을 그려 냈던 것이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동물들을 사랑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동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체호프의 글쓰기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계열의 작품들은 대체로 체호프의 따사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하얀 이마>에서도 배고픈 어미 늑대와 여기에 대립되는 강아지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양자의 관계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진다. 특히 강아지가 보여 주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아이들의 심리와 유사하다. 안톤 체호프의 형 아폴론 체호프의 회상에 따르면 “멜리호보의 마당에서 살던 세 마리의 검은 개들 중에서 ‘하얀 이마’도 있었다”라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동물의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과 이해가 가능했고, 이것을 다시금 아이들 심리에 접목시키는 체호프의 능란한 기교와 따듯한 시선을 거쳐 ‘하얀 이마’라는 이름은 불멸이 되었다.
둘째, 아이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선별할 수 있다. <그리샤>, <아이들>, <사건>, <사내애들>, <기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작품에서는 아이들의 연령별 심리 상태에 대한 체호프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살필 수 있다. <그리샤>에서는 갓난아이, <아이들>에서는 학교 입학 전후의 아이들, <사내애들>에서는 청소년들의 심리 상태가 낱낱이 고려된다. 교훈적 성격보다는 아이들의 일상이 우선하며, 사건보다는 아이들의 심리가 부각된다. <아이들>은 체호프가 B. 마옙스키 대령의 자녀들을 관찰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 체호프의 형 미하일 체호프에 따르면 “동생이 친하게 지냈던 아냐, 소냐, 알료샤는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었고 동생은 단편 <아이들>에서 그 아이들을 묘사했다”라고 썼다. 미하일의 언급에서 보듯이, 체호프는 아이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해 간략하게 심리의 핵심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심리, 초점을 좁혀 아이들의 심리를 잡아내는 솜씨는 톨스토이가 격찬했듯이, <아이들>을 체호프의 가장 훌륭한 단편들 중 하나로 만들어 냈다.
셋째, 어른들의 시선에서 본 아이들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이 계열의 작품들에는 어른들의 심리와 아이들의 심리가 평행선을 긋는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체호프는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는다. 상황을 만들어 내는 여러 인물들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치중한다. 이러한 미학적 태도는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 결과 아이들의 심리와 어른들의 심리는 섞이거나 어느 한쪽으로 수렴되어 강한 주제 의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일견하기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논리가 소통의 과정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대 간 소통의 부재라는 거창한 논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소통의 단절은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의 한 단면일 뿐이며, 이것이 문학작품 안으로 들어올 경우 평행선을 긋는 심리의 표출로 드러날 뿐이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집에서>다. 세료자와 아버지 사이의 원활한 소통의 부재는 각각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역시 심리를 파헤치는 체호프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넷째,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군을 가려 낼 수 있다. 이 작품 계열에서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어른이다. 반면 사건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시선은 아이들의 것이다. 이렇듯 사건의 주체와 사건을 전달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상이함이 미학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서 인생 경험이 아직 부족하고, 지적 능력이 아직 온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당연히 제한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아이들은 자신이 목격하는 어른들의 행동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천진한 아이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속물성이 비판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순진함이 그대로 전달되기도 하며, 아이들이 보여 주는 이해의 부족함을 섬세하게 그려 냄으로써 이야기의 재미가 배가되기도 한다. 기법적으로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이것이 완벽하게 구사된다면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비평가 L. 오볼렌스키는 <식모가 시집간다네>를 두고 “섬세한 관찰, 두세 줄 또는 몇 단어로 모든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놀랍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많은 비평가들 역시 <식모가 시집간다네>를 두고 아이들의 심리를 잘 파고들었다고 평가했다. <식모가 시집간다네>, <악동>, <지노치카> 등을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지적할 수 있다.
다섯째, 아이들이 읽을 만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을 따로 묶어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데 별반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동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 의식이 아이들이 읽기에 크게 어렵지도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 아동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동물들을 의인화한 작품들과는 반대로 아동문학의 성격을 가장 적게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체호프 아동 소설선≫ 가운데 <어수룩한 사람>, <가정교사>, <모략꾼들-목격자들의 이야기>, <편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체호프의 개인적 경험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끌어왔다. <어수룩한 사람>과 <가정교사>는 체호프 자신이 중학교와 의대를 다니면서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가정교사 일에서 그 모티프를 끌어왔으며, <모략꾼들−목격자들의 이야기>는 1887년 8월 7일 예견되었던 일식을 소재로 삼았다. 이렇듯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 짧은 분량 안에 나름대로 뚜렷한 에피소드적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 이들 작품의 공통분모다. 왜냐하면 분량이 길면 아이들이 읽기에 부담스러우며 에피소드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아이들의 이해력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안톤 체호프 아동 소설선집으로, 체호프의 아동 단편소설 15편이 실려 있다. ‘하얀 이마’는 어린이를 위해 쓰고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처음이자 유일한 단편이다. 안동진 역자는 아동문학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체호프의 작품 가운데 되도록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을 선별해 번역했다.
지은이
체호프는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했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된 농노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중학 생활을 마쳤다. 1879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오락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전반, 수년에 걸쳐 <어느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하사관 프리시베예프>, <슬픔>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작가 그리고로비치의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가 담긴 편지에 감동하고 자각해 <초원>을 썼다. 희곡 <이바노프>, <지루한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 지식인들의 우울한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 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단편소설 <결투>, <검은 수사>,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골짜기> 등을 집필했다. 1896년 희곡 <갈매기>의 상연 실패는 그를 담시 극작가의 길에서 멀어지게 했으나, <바냐 아저씨>를 써낸 이듬해인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단의 <갈매기> 상연은 성공적이었다. 1900년에 극단을 위해 <세 자매>를 썼다. 만년의 병환 속에서 <벚꽃 동산>을 집필해 1904년에 상연하고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해 요양지인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작고했다.
옮긴이
안동진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북 고창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참 좋아했다.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그리고 ≪삼국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문과를 가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선택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설정에 한몫을 단단히 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노어과를 선택했지만 문학의 길을 고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투르게네프의 주관의 미학>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투르게네프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투르게네프는 대학 시절인 1843년 폴랭 비아르도를 만난다. 그리고 평생을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유부녀였다. 결국 투르게네프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문학 연구가는 연구 대상이 되는 작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다. 역자 역시 대학 시절에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투르게네프와 달리 그 평생 반려자와 결혼에 성공했다. 지금 이 시점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과 사랑스러운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삶의 목표는 문학을 사랑하는 것이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자 한다.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법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으며, 아이들과 글쓰기 과정을 함께하고 있다. 논문으로 <이반 촌낀-그 뒤섞인 세계> 등이 있으며, 기타 여러 잡문이 있다.
차례
하얀 이마
지노치카
집에서
모략꾼들−목격자들의 이야기
어수룩한 사람
편지
식모가 시집간다네
아이들
그리샤
교외에서 보낸 하루
사건
가정교사
사내애들
기쁨
악동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비가 오기 시작하는군!” 뼈가 앙상한 맨발로 먼지를 풀썩풀썩 일으키면서 제화공이 중얼거렸다. “페클라 오빠한테는 다행이야. 풀과 나무는 우리가 빵을 먹듯이 비를 먹거든. 우레는 걱정하지 마라. 애야. 뭣 때문에 너같이 작은 아이를 해치겠니?”
비가 오기 시작하자 바람은 잦아들었다. 막 싹을 틔운 어린 호밀과 바싹 마른 길을 작은 파편처럼 두드리면서 비만 떠들썩하게 내리고 있었다.
“페클라슈카. 우리 둘 다 흠뻑 젖겠구나!” 테렌티가 중얼거렸다. “마른 곳은 하나도 안 남겠네…. 호호, 이런! 목까지 젖었구나! 하지만 걱정 마라. 얘야… 풀이 마르고 땅이 마르면 우리도 마르는 거거든. 해는 하나지만 모두를 위한 거니까.”
―<교외에서 보낸 하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