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서기원의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박명기>, <상속자>, <반공일>을 엮었다. 이 단편들은 방황과 탈출에 관한 일종의 교본이다. 인물은 제도화한 현실로부터 하나같이 벗어나려 한다. 생계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 부도덕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내리거나(<암사지도>),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 상실의 현실에서 공멸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힘든 발걸음을 내딛고(<이 성숙한 밤의 포옹>), 상처를 향한 윤리적 고백을 감행하고(<박명기>), 낡은 가치로부터 탈출하며(<상속자>), 생계의 논리 안에서도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행동(<반공일>)을 선택한다.
흔히들 서기원을 전후 세대의 회의와 절망을 잘 그려낸 작가라고 말하지만 작품의 의미는 이를 상회한다. 서기원은 전후의 억압적 상황과 인간의 탐욕을 주체 내부의 윤리적 선택과 결단의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진정한 이름을 얻게 되는 단계 또한 결단의 지점에 놓았다. 이는 현실에 대한 비타협성의 선택이 아니라 주체가 바로 비타협적 선택의 용기와 의지 안에서 생성된다고 믿는 작가의 윤리적 선택을 볼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자주 보는 흔한 청춘 소설과의 변별 지점이 여기에 있다. 서기원은 우리가 좀 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한 질문을 던지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를 종용한다.
200자평
이상을 좇아 산화한 인간 군상을 그리는 서기원의 대표 단편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박명기(薄明記)>, <상속자>, <반공일>을 엮었다. 등단작 <암사지도>에서 보듯 저자는 전후의 경험을 특징적으로 다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등장인물들의 방황과 일탈은 결국 자멸로 이어지지만 여느 청춘소설과는 다르게 억압적 상황과 인간의 탐욕을 윤리적 선택과 결단으로 풀어 간다. 서기원의 단편을 통해서 독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지은이
서기원(徐基源, 1930∼2005)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공군에 입대해 다음 해 3월 공군 소위로 임관하고 26세가 되던 1955년 대위로 예편한다. 그 후 결혼을 하고 1956년 동화통신사 기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중 1956년 <현대문학>에 <안락사론(安樂死論)>, <암사지도(暗射地圖)>로 등단한다. 이후 31세 때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이듬해 서울신문사, 1963년 서울경제신문사, 36세 때는 다시 서울신문사로 가서 주일 특파원으로 일본에 간다. 38세 때는 동화통신사 경제부장, 1970년에는 청와대 대변인, 1976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 1988년에는 서울신문사 사장 및 신문협회 회장, 1990년 KBS 사장 및 방송협회 회장을 지냈다. <오늘과 내일>로 현대문학 신인상,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는 <안락사론>, <암사지도>, <밀몽화>, <기반>, <음모 가족>, <오늘과 내일>, <변신>, <사지 연습>,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박명기>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작은 개인과 시대와의 대결 속에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는 상황과 인물의 윤리적 면모에 주목하는 소설이 많다. 전쟁의 극한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현실의 여러 기준에 인물들이 좌절하고 도피하고 때로는 맞서기도 하는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작가가 마주치는 상황은 인간적인 관계들인 가족, 친구, 애인 등을 현실의 저점에까지 내려 보내는 데서 출발한다. 외부적 상황 때문에 고문당하고 가족을 죽이고 애인을 욕보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선택은 인물을 구원할 유일한 지점으로 제시된다. 의지는 현실에 맞설 유일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중기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인민군 군관에 대한 짝사랑, 일본에 파견된 정보원, 한국과 미국의 민족 감정, 독립운동가의 기행, 꿈, 언론 자유, 임신중절, 정치 지망생 등 생활 주변의 소재와 함께 작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얻게 된 소재가 많이 활용된다. 특히 <전야제>는 초기작에서 많이 드러난 전쟁의 경험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쟁 중에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한 인물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외적 상황에 길항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다. 폐병에 걸린 친구와 여대생 지숙의 사랑 등을 내밀하게 보여주며, 죽어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장면에서는 윤리적인 승화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로 오면 ≪마록열전≫ 계통의 연작 소설과 ≪김옥균≫, ≪혁명≫, ≪왕조의 제단≫ 같은 역사소설을 창작하게 된다. ≪마록열전≫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현실 논리와 욕망의 허망함을 그리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 심한 욕으로 쓰는 ‘바카야로(馬鹿野郞)’의 ‘바카(馬鹿)’를 따서 제목을 지은 ≪마록열전≫ 다섯 편의 주인공들, 즉 마록, 마록삼, 마준, 마명민, 마영 모두 어떤 거대한 논리와 힘에 조종당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나약한 개인 앞에 현실은 너무도 거대하고 차가울 뿐임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후의 역사물에서도 냉혹한 현실에서 개인의 순정한 이상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택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이상을 좇아 산화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향한 조가(弔歌)인 셈이다.
엮은이
이훈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청준 소설의 알레고리 기법 연구>(1999)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07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평론으로는 <지옥의 순례자, 역설적 상실의 제의-편혜영론>, <부재, 찰나, 생성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냉장고를 친구로 둔 인간, 피뢰침이 된 인간>, <생의 환상, 공전의 미학-박완서론>, <사랑을 부르는 매혹적 요구>,<부정의 부정-허혜란론>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19
암사지도(暗射地圖) ···············23
이 성숙(成熟)한 밤의 포옹(抱擁) ··········57
박명기(薄明記) ··················99
상속자(相續者) ·················129
반공일(半空日) ·················155
지은이 연보 ···················175
엮은이에 대해 ··················179
책속으로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와 목을 훔친 다음 코에 대어보았다. 땀이 쉰 나의 체취가 코를 쑤셨다.
그 냄새는 분명히 내 것이었다.
상희야, 너한테 가서 내가 지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너의 뚫어진 허파에서 마지막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음식점과 창가가 꽉 들어찬 이 거대한 도시 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하늘에 쳐들고 혓바닥으로 빗방울을 받아 마셔가며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