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손소희는 작품을 통해서 남녀의 애정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그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운명과 정신적 구원에 관심을 가진 작가였다. 초기 작품은, 일제 말과 해방이라는 역사 배경에서 전개되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그리는 데 초점을 두고 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가난이나 도덕적 해이를 다루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을 그리는 데 주력한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태 문제와 애정 윤리의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특히 결혼 제도나 부부애의 문제, 여성 주체성의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몽환적인 세계 인식과 서정성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을 선보이기도 한다.
<리라기>는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리라’라는 여성을 통해, 손소희의 초기 작품에서 주로 많이 나타나는 애정 문제와 민족의식이 얽힌 젊은이들의 고민이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리라’는 독립운동가인 남편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딸과 함께 만주로 향한다. 그곳 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만난 ‘진성’에게 구애를 받고 마음이 흔들리지만, 리라는 남편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광복 후에 돌아온 리라의 남편 ‘이영’은 소련에서 만나 자신을 정성껏 치료해 준 것을 계기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간호사 ‘니나’의 존재를 리라에게 알린다. 이영은 리라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며 용서를 바라지만, 리라는 남편을 떠나 시골 학교 선생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이영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전보를 받은 리라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가 죽으면 자신도 죽겠다고 말한다. 결국 이영이 살아나자 그녀는 이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50년대 초반 발표한 <닳아진 나사>는 당시 손소희가 관심을 가졌던 전쟁 이후의 혼돈스러운 정국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지 노인은 왕년에는 공자와 맹자를 논하던, 마을에서 알아주던 훈장이었지만, 전쟁 이후 아들과 며느리에게 얹혀살며, 어린 손녀들에게까지 식충이라는 무시를 당한다. 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나간 장터에서 사주를 봐주며 벌이를 하게 되고, 그렇게 사주 풀이를 하며 돈을 모으던 중 사고를 당하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창포 필 무렵>은 손소희 작품 중에서 예외적으로 순수 서정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작품 역시 손소희만의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경호)’는 소학교 6학년생이다. 어느 날 자신의 사촌인 동수와 자주 가재 잡이를 하는 개울을 지나가다가, 반석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연모의 정을 느끼는데, 그이가 바로 동수의 사촌 누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수의 사촌 누나는 병에 걸려 요양 중이다.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동수네 집으로 놀러 가서 동수와 함께 사촌 누이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단오를 앞두고 누나에게 줄 창포를 따러 산에 간 ‘나’는 우연히 누나와 자신의 큰형의 밀애 장면을 보게 된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낀 ‘나’는 형을 향해 돌을 던지는데, 그 돌을 누나가 맞게 된다. 누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각혈을 심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날의 햇빛>은 손소희가 초기 소설부터 즐겨 다루던 남녀 간의 애정 문제가 좀 더 본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제약회사를 경영하는 부잣집의 자식인 약대생 유현과 살인강도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로 절에서 자라난 미대생 임철, 그리고 유현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여대생 진희의 삼각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드러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다.
200자평
손소희의 작품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는 <리라기>, <닳아진 나사>, <창포 필 무렵>, <그날의 햇빛은>을 엮었다. 이 작품들은 각각 역사 사건을 배경으로 한 남녀 애정의 문제, 전쟁 이후 황폐해진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 서정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성의 문제, 몽환적 세계 인식을 통한 죽음 또는 운명과의 대결을 그린다.
지은이
손소희는 1917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유복한 가정의 막내로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고, 함흥 영생여고로 유학을 갈 무렵인 1932년부터 동시를 발표하고 영시를 낭독하는 등, 문학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1936년 고등학교 졸업 후, 1937년 일본 니혼대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병으로 귀국하고,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잦은 신병으로 결국 포기한다. 1961년 만학으로 한국 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한다. 1939년 만주로 건너가 장춘에 있는 <만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면서 염상섭, 안수길, 이석훈 등을 만난다. 그의 문필 생활은 1939년 <고독> 등 10여 편의 시를 ≪재만 조선인 10인 시집≫에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서는 1946년 <백민>에 단편 <맥에의 몌별>을 선보이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48년 <신천지>에 <리라기>를 발표하고, 이어 <회심>, <현해탄>, <지류> 등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한다. 1949년 전숙희(田淑禧), 조경희(趙敬姬) 등과 월간 종합지 <혜성(彗星)>을 펴내고 주간을 맡았으나 1950년 전쟁으로 발간이 중단되었다. 6·25전쟁 때는 피난지에서 계속 창작 활동에 전념했으며, 부산 피난 시절에는 다방 ‘금강’, ‘밀다원’ 등에서 집필을 계속했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1960년 단편소설 <그날의 햇빛은>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4년에는 오슬로에서 열린 제32차 국제펜클럽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5월문예상을 수상했다. 1982년 예술원 문학상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3년 도서출판 한국문학사를 창설하고, 순문예지 <한국문학>을 간행하는 등 출판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문화·활자 보급에 대한 의식이 선구적이었다. 1960∼1974년 한국펜클럽 중앙위원을 지냈고, 펜클럽 한국 대표(1964년, 1971년), 1974년 한국여류문인협회장, 1981년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1981∼1987년 예술원 회원, 1983년 소설가협회 운영분과위원장, 문인협회 이사, 중앙대학교 예술대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71세가 되던 1987년 1월 7일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엮은이
손보미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2009년 <21세기 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18
리라기(梨羅記) ··················21
닳아진 나사 ···················95
창포(菖蒲) 필 무렵 ···············123
그날의 햇빛은 ··················151
엮은이에 대해 ··················212
책속으로
“그럼 에스더는 이름이 없어서 어떻게 하려구?”하였더니, “순희는 어떨까요? 그럼 순희가 안 듣겠지요? 그럼 마리아가 되겠어요. 유현 씨의 영구차를 따라가며 생각한 내 이름이에요 – 마리아.” 가만히 입속으로 되풀이해서 뇌이고 있을 뿐 순희의 핀잔이나 타협은 물론이요, 뇌파검사를 해야 한다는 나의 요청도 그녀는 일체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그날의 햇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