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근대의 힘에 대한 매혹과 팽창 의지
<신경>(1942. 10)은 주인공이 학생들의 취직자리 알선을 위해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출장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훌륭한 근대 도시가 된 신경과 새 만주에 대한 호기심도 있는 터여서 행한 출장이다. 신경의 웅대한 근대도시 속에 우뚝 선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을 바라보며, 동양이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한다.이 소설에서 유진오는 만주국을 새로운 기회의 공간으로 판단한다. 그 이유는 “개인 및 그것을 기초로 한 국가에서 세계국가로 비약하기 전에 현 국가를 초월하는 그러나 지역적인 단체 개념이 탄생”해야 한다는 시대인식 때문이다. 이 소설은“살어 있다는 오즉 그 간단한 사실에 대해, 철이 그처럼 행복과 감사를 느낀 것은 처음 일이었다”며 허무에의 의지를 극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결말은 불리한 정세와 환경으로 인해 실현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이상을 괄호 친 채 생활 세계의 비루함을 견디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만주는 생활 세계의 외연적인 확장일 뿐이며, 조선인과 만주인의 차별 역시 비루한 생활 세계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창랑정기>(1938. 4. 19∼5. 4)는 당인리 부근 한강 가에 세워진 창랑정이라는 정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에 착목하지 않은 채 근대와 전통이라는 보편적인 문명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강 대신이 반일의 기치에서 세상과 등을 진 것이 아니라 ‘양이’의 신념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은 반서구화 혹은 반근대화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뭇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기”가 요란히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하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문제적이다.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일전쟁의 의미 맥락은 생략한 채, ‘대륙의 하늘을 뭇찌르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 대 비문명의 대비 속에 팽창하는 근대화의 과정으로 대륙과 만주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실존의 고독과 생명의 자기 확인
<봄>(1940. 1)은 어린 아들이 성홍열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입원한 상황에서 그 병세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포착했다. 또한 벚꽃의 흥성스런 화사함과 병원 안의 병자의 고립감의 대비를 통해 생명력과 죽음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가을>(1939. 5)은 일상 세계를 산책하면서 사색하는 새로운 유형의 산책자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어젯밤부터 오늘 밤의 귀가까지 만 하루 동안 주인공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하루라는 시간 체계는 전근대적 일상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일상의 확실한 분절적 매듭이 되었다. 또한 회상과 기억을 통한 서술 방법은 하루라는 시간 체계 속에서 삶의 중요한 반성을 하고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호는 여러 해째 소모병(消耗病)과 싸우고 있는데, 이 병은 신진대사에 필요한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어 면역력 체계가 극히 허약해지는 물리적인 특징을 지녔다. 이 병은 자신의 이상에 맞지 않는 식민지 자본주의적 생활 세계에 대한 ‘면역력 결핍’으로 빚어지는 무력함을 상징한다. 이처럼 시대의 압박으로 생활 세계에서 그 꿈을 확산시키지 못한 채 실존의 기억과 가치관 속으로 그 꿈을 유폐시키는 생활 부적응의 문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화자는 꿈을 꾸었던 젊은 시절을 회의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자신이 믿는 가치를 되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 유랑을 떠나는 친구처럼 빈궁과 낭비로 삶을 메마르게 하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생활 세계의 황폐함을 보고 젊은 시절 추구했던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
생활 세계는 정신과 이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신체와 감각의 세계를 포괄하며, 순간의 일회성과 직선지향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뒤섞여 흐르는 와류 같은 것이다. 유진오 소설은 지향하는 이상과 가치의 세계를 생활 세계 속에 접합하고 실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분열과 균열의 틈새를 보이지만, 이 틈새 속에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문화와 자유의 가치를 견지하는 굳건한 생명력이 섬세한 흔들림으로 빛나고 있다.
200자평
유진오의 일제 말 소설들은 지금의 독자와 소통하며 공유하는 힘과, 문화와 자유를 옹호하고 민족의 앞길을 헤아려 본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정 편력이라는 생활 세계로 침잠한 유진오의 소설은 식민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생활 감각과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 준다. 식민지 생활 세계를 살아가는 지식인 유진오의 시대와 정세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본다.
지은이
유진오는 1906년 5월 제1회 관비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 유치형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재동공립보통학교와 1919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한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1926년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하지만, ‘경제연구회’에서 사회사상과 경제의 제 문제를 공부한다. 1927년 ≪조선지광≫에 <복수>, <스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한다. 1929년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형법연구실 조수로 일한다. 이때를 전후해 이효석과 함께 ‘카프’로부터 가입 권고를 받고 거절했으나 작품 경향이 사회문제와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어 ‘동반자 작가’라는 칭호를 듣는다. 1931년 유진오가 중심이 되어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선 사회사를 연구했으나 1932년 경찰 당국에 의해 위험 단체로 지목되어 연구소는 강제 폐쇄된다. 1933년 보성전문 교수(전임강사)가 되었다. 1935년 <김 강사와 T교수>, 1938년 장편 ≪화상보≫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창랑정기>, <어떤 부처>,<수난의 기록>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가을>, <나비>, <이혼> 등을, 1940년에는 <봄>, <여름>(일문) 등을, 1941년에 <마차>, <산울림>, <젊은 아내>, <기차 안에서>(일문) 등을 발표한다. 1942년 <신경>, <정 선달>, <남곡 선생>(일문)을 발표하고, 1943년 <가마>, <식모난>,<입학 전후>, 1944년 <김포 아주머니>를 발표한다.
해방 후에는 문학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과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법조계와 교육계에서 일한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하였으며, 1967년 신민당의 대표위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68년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1970년까지 활동한다. 1987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다.
엮은이
진영복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원대학교, 명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자기지시적 글쓰기의 분석과 해석≫, ≪한국현대문학사≫(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성의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1920년대 대중적 글쓰기와 근대적 주체의 자유상>, <일상세계에서 찾는 소설의 전망>, <“순애보”의 자기 소멸을 통한 주체화 방식> 등이 있다. 역서로는 ≪소세키를 다시 읽는다≫(공역), ≪이야기된 자기≫(공역) 등이 있다.
차례
신경(新京)
창랑정기(滄浪亭記)
봄
가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히 鄕愁가 저려든다”고 시인 C군은 노래하였지만 사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란 짭잘하고도 달콤하며 아름답고도 안타까우며 기뿌고도 설어우며 제 몸속에 있는 것이로되 정체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혹 우리가 무엇에 낙망하거나 실패하거나 해서 몸과 마음이 고닲은 때면은 그야말로 바닷물같이 오장륙부 속으로 저려 들어와 지나간 기억을 분홍의 한 빛갈로 물칠해 버리고 소년시절을 보내던 시굴집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이며 한 글방에서 공부하고 겨울이면 같이 닭서리 해다 먹던 수남이 복동이들이 그리워서 앉도 서도 못하도록 우리의 몸을 다을게 맨드는 이상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창랑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