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춘원 이광수는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일부 작품 구성상의 문제, 역사의식 실종 및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의 혼동, 친일적인 문필활동 등이 논란이 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가 쓴 ≪무정≫의 문학적 의의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무정≫은 6월 28일부터 7월 말까지의 약 한 달 간이 배경이다. 이전 소설들이 대개 주인공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했던 것과 달리 ≪무정≫은 한 달가량의 시간만을 다루고,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운명을 통해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이형식, 박영채, 김선형이라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랑 문제와 자아 각성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광수에게 있어서 ‘사랑’은 단순히 서사적 모티브라기보다 그 자체로서 계몽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광수가 끊임없이 주창하고 있는 ‘자유연애’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이자 근대성의 핵심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계몽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이광수가 ≪무정≫을 통해 ‘자유연애’ 사상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은 자아 각성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자유연애’를 강조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을 구시대의 윤리적·관습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면, 이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아 찾기 혹은 자기 발견이다. ≪무정≫은 이형식과 박영채라는 두 인물의 개인적 삶을 통해 이들이 각자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자기 발견의 과정을 보여 준다.
한편 ≪무정≫은 이형식, 김선형, 김병욱 같은 인텔리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당시 민중의식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고,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계몽사상을 주창함으로써 대중과 동떨어졌다는 결함도 지니고 있다.
흔히 이광수는 장편 작가로 평가된다. 그러다 보니 그의 단편은 장편에 비해 주목을 덜 받는다. 장편의 수준이 더 높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편은 당시로서는 선구적이었으며, 참신한 문장이었다. 단편이 많지 않았던 때에 그 정도의 수준을 이뤘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공적이 아닐 수 없다.
<소년의 비애>는 ≪무정≫과 같은 해에 나온 작품으로, ≪무정≫에 나타난 구시대적 사랑 및 결혼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종매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문호가 아끼고 사랑하던 난수의 결혼 문제에 접근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문호는 종매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 난수가 제일 뛰어났고 문호는 그런 난수를 귀애하였다. 난수 나이 십육 세가 되자 집안에서는 그녀를 어느 부호의 자제와 약혼시킨다. 문호는 이를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 난수는 천치 신랑에게 가 버림으로써 문호가 크게 낙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무정≫과 달리 국한문 혼용체이며, 소설적 구성이나 문장이 미숙할 뿐 아니라 주제도 선명하지 못하다. 하지만 조혼의 악습을 문제 삼음으로써 당시 혼인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계몽주의 정신이 짙게 배어난다. 뿐만 아니라 ≪무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교육의 필요성 역시 이 작품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200자평
≪무정≫은 원전에서 4분의 1가량을 발췌했으며 <소년(少年)의 비애(悲哀)>는 전작을 실었다.
지은이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 고전을 잘 읽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1세 때 콜레라로 부모가 사망, 외가·재당숙 집을 전전했다.
1909년 <노예>, 일문 <사랑인가>, <호>를 습작으로 썼고, 그해 12월에는 <정육론>을 ≪황성신문≫에 발표했다.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이 됐다.
1915년 9월 김성수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했고, 1917년 1월 1일부터 ≪무정≫을 연재했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1917)·<방황>(1918)·<윤광호>(1918)를 탈고하여 ≪청춘≫에 발표했다.
1918년에는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 논설을 많이 썼다. 그러나 1921년 4월 주위의 만류에도 귀국, 왜경에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 된다. 그는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1910년대에 지녔던 진보성을 상실하고 봉건적이며 친일적인 문필활동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다.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했다. 1923년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단당하기도 했다. 그 후 ≪허생전≫(1923)·≪재생≫(1924)·≪마의 태자≫(1926)·≪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쓰는 한편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붙잡혔지만 반년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친일 연설을 하며 각지를 유세했다. 해방 후 반민법으로 구속됐지만 역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
엮은이
김종회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동안 활발한 비평 활동을 보이는 한편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과 주간을 맡아 왔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시와시학상, 유심작품상, 경희문학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 ≪위기의 시대와 문학≫(세계사, 1996), ≪문학의 숲과 나무≫(민음사, 2002), ≪문화 통합의 시대와 문학≫(문학수첩, 2004), ≪문학과 예술혼≫(문학의숲, 2007),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민음사, 2007)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특히 사단법인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총장, 통일문화연구원 원장 등의 주요 경력과 관련하여 북한 문학과 해외 동포 문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많으며, 그 결과로 ≪북한문학의 이해≫1∼4권 및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1∼2권을 엮은 바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무정(無情)
소년(少年)의 비애(悲哀)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네의 얼골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잇슬 것 갓지 안이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몃 푼엇치 안이되는 농사한 지식 가지고 그져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셔 몃 해 동안 하나님이 가만히 두면 썩온 볏섭이나 모화두엇다가는 한번 물이 나면 다 씻겨보내고 만다. 그래셔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짐 업시 졈졈 더 가난하여진다. 그래셔 미련하야진다. 져대로 내어버려 두면 맛참내 북해도에 아이누가 다름업는 죵자가 되고 말 것 갓다.
져들에게 힘을 쥬어야 하겟다. 지식을 주어야 하겟다. 그리해셔 생활의 근거를 안젼하게 하여 쥬어야 하겟다.
“과학(科學)- 과학- 하고 형식은 려관에 돌아와 안져셔 혼자 부르지졋다. 셰 쳐녀는 형식을 본다.
“조션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져 과학(科學)을 쥬어겟셔요. 지식을 주어야겟셔요” 하고 쥬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셔 일어나 방 안으로 그닌다. “여러분은 오날 그 광경 보고 엇더케 생각하심닛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