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붕구의 비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째, 전후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추동했다는 점이다. 전후문학에서 실존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축적되어 있다. 반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증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김붕구의 경우 매우 엄밀하게 당대 프랑스 실존주의에 대한 수용 양상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막연히 실존주의적 경향으로 인식되어 온 전후문학의 특성을 보다 정치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그가 외국 문학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이에 대한 나름의 능동적 변용을 통해 전후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둘째,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전개시켰다는 점이다.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의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작가와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문학사 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김붕구는 프랑스 문예사조의 체계적 수용과 능동적 변용, 나아가 작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천착을 통해 전후문학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비평 세계를 보여 준다. 김붕구의 비평 세계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비평을 통해 한국 전후문학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으로부터 외국 문학의 기계적 이식을 넘어 능동적인 탈식민적 수용이 지니는 의미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자평
김붕구는 전후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 문예사조를 당시 누구보다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한국의 현실에 접목시킨 비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비평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 책에는 김붕구의 대표적인 비평문을 수록했다. 장성규가 엮고 해설했다.
지은이
김붕구(金鵬九, 1922∼1991)는 1922년에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담(石潭)이다. 1944년에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수학하고, 1950년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보들레르의 ≪악의 꽃≫, 르나르의 ≪홍당무≫,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카뮈의 ≪반항인≫,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번역했고, ≪불문학 산고≫, ≪작가와 사회≫, ≪프랑스 문학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엮은이
장성규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인문학부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가톨릭대·경기대·경희대·광운대·성공회대·중앙대 등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쳐 왔으며, 2013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후국내연수 과정을 거쳤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리얼리티를 탐색하는 세 가지 형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연구서로 ≪‘문’과 ‘노벨’의 장르사회학≫, ≪식민지 근대의 뜨거운 만화경≫(공저), ≪아프레게르와 손장순 문학≫(공저), ≪박태원 문학 연구의 재인식≫(공저), ≪영구 혁명의 문학들≫(공저)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사막에서 리얼리즘≫, ≪신성한 잉여≫가 있다.
차례
現代文學의 知性的 雰圍氣
휴머니즘의 再建−까뮈를 中心으로 한 批判
實存主義 文學
발작그의 ‘人間劇’−巨匠 발작그의 作品 世界와 現代文學
人間的인 것−文學과 휴머니즘
니힐리즘을 넘어서−까뮈의 ≪正午의 思想≫
證言으로서의 文學
文明의 危機와 小說의 危機−누보로망의 文化史的 意義
니힐리즘과 西歐 文學−激動期가 낳은 虛無의 흐름
해설
김붕구는
엮은이 장성규는
책속으로
대체 ‘證人’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얼핏 訴訟事件을 연상합니다. 그렇습니다. ‘訴訟’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누가 審判臺에서 判決을 받고 있느냐? ‘人間’입니다. 그들이 神의 沈默을 宣言하고 至上至高의 자리에서 絶對者를 끌어내린 이상 누군가 그 자리에 올라앉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올라앉을 것이냐? 물론 人間입니다. 그 至高의 자리를 메꾼 人間은 이제 자기가 자기를 다스려야 할 판입니다. 자, 그들이 과연 죄를 범하지 않고−‘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다스릴 수 있겠느냐? 이것은 바로 玉座가 아니고 審判臺(被告席)입니다.
그다음 證人이라 함은 六法全書를 뜨르르 끼는 專門家나 理論家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소 겪은 體驗者, 目睹者를 의미합니다. 이 점이 싸르트르와 까뮈를 말할 제 흔히 지적하는 성격의 차이며 까뮈가 유달리 우리를 끄는 매력이기도 합니다. 탁월한 평론가 왈레 氏가 다음과 같이 말할 제 싸르트르 氏에겐 좀 안된 일이지만 作家 까뮈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즉,
“까뮈의 作品에는 그의 哲學 以上의 것이 들어 있지만… 싸르트르의 경우는 그의 반대다. … 우리는 싸르트르의 히한한 理論에 감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 說服되지는 않는다. …암만해도 어딘가 주사위의 눈을 속인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몸소 그 속에서 살아온 체험자일 뿐 아니라 결코 주사위의 눈을 속일 렴려가 없는 ‘믿을 만한 者’−이것이 證人의 셋째 조건입니다.
―<휴머니즘의 再建−까뮈를 中心으로 한 批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