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시적 사유와 방법적 깊이의 차원에서 굳이 아방가르드의 계보를 작성하자면 이상을 시작으로 조향, 김수영, 김춘수를 거쳐 이승훈, 오규원,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등으로 이어진 흐름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인들 중 시와 시론 모두에서 지속적인 탐색과 변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시사에 일정한 충격파와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이는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 시사의 아방가르드 시인들 중에 이승훈은 시와 시론 사이의 경계를 가장 뚜렷하게 해체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방가르드적인 세계는 내적 응축 내지 함열(陷裂)의 성격을 띤다. 이것은 그의 의식의 방향이 외부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부 혹은 내면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비대상시와 시론이 나오기 이전 그의 의식 세계를 지배한 것은 불안, 공포, 소외, 고독, 분리, 추위 같은 어두운 내면의 심리와 감정이었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외부 대상의 존재를 자신의 세계에서 배제하고 제거하게 한다. 외부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의식이 겨냥한 것은 나를 나로부터 분리시키고 언어 자체에 도취하는 비대상의 세계이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은 ‘완전한 내면의 응결’이자 ‘내면세계의 밖으로의 투사’(<발견으로서의 수법>)다. 비대상이 내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에고’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 자신도 자신의 시 쓰기의 목적을 ‘자아 찾기의 긴 여정’(<자아 찾기의 긴 여정>)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자아 찾기라는 여정을 위해 그는 ‘내면(내면성)−비대상−해체−선’이라는 사유의 방법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변주하면서 독자적인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써 온 것이다. 자아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와 선 사상, 언어(언어 중심)와 자기 수양(무아 중심), 시와 비시(일상), 인식과 존재 등의 영역까지 포괄하고 있으며, 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사유의 궤적은 그의 자아 찾기가 그렇듯이 하나의 ‘생성’ 그 자체다. 그는 40년 넘게 자아의 문제를 천착해 오면서 그 자아를 긍정하기도 하고 또 부정하기도 했지만 이상처럼 그 자아에 대해 죽음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자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다양한 의미의 변화와 생성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 변화와 생성은 시와 시론에 걸쳐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나타난다.
200자평
아방가르드 시인이면서 이론가인 이승훈의 평론 선집이다. 그는 김수영 김춘수 등의 뒤를 이어 시와 시론 모두에서 지속적인 탐색과 변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시사에 일정한 충격파와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또 그는 시와 시론 사이의 경계를 가장 뚜렷하게 해체한 시인이기도 하다.
지은이
이승훈(李昇薰)은 194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1962년 4월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현대시≫ 동인으로 1972년까지 활동했다.
1968년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박사 과정 중이던 1980년에는 한양대 인문대 국문과 조교수로 부임했고, 부교수, 교수를 지냈다. 1989년 고려원에서 시 전문 계간지 ≪현대시사상≫을 창간해 10년 동안 주간을 맡았다. 1998년 시 전문 계간지 ≪시와 반시≫ 편집자문위원을, 1999년 월간 ≪현대시≫ 추천심의위원을, 2003년 시 전문 계간지 ≪시와 세계≫ 편집자문위원을 지냈다. 2008년 2월 한양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 정년퇴임을 했고 현재는 한양대 명예교수다.
1972년 강원도문화상, 1984년 현대문학상, 1986년 한국시협상, 2004년 시와시학상, 2004년 백남학술상, 2007년 김삿갓문학상, 2007년 제1회 심연수문학상, 2008년 제1회 이상시문학상, 2008년 제1회 김준오시학상, 2013년 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해설자
이재복(李在福)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2001)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 호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화계간지 ≪쿨투라≫, 인문·사회 저널 ≪본질과 현상≫, 문학계간지 ≪시와 사상≫, ≪시로 여는 세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에 제9회 고석규 비평문학상과 제5회 젊은평론가상, 2009년에 애지문학상(비평), 2013년에 제23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등이 있다.
차례
비대상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빔밥 시론
변기와 인터랙티브 미학
예술, 나를 웃겨라
김춘수와 무의미시의 세 유형
선과 조오현
선과 아방가르드
해설
이승훈은
해설자 이재복은
책속으로
‘나’는 시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에 의해 구성된다. 이제는 창조적 조건이 문제된다.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지금 ‘달이 뜬 밤 A 시에서 술을 마신다’고 쓴다. 시 속에 나오는 ‘나’는 지금 이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나’이다. 그럼 내가 지금 A 시에서 술을 마신다고? 시를 쓰는 ‘나’는 시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나’는 지금 시를 쓰는 ‘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나’는 누구이며 시 속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독자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시를 쓸 때 시를 쓰는 ‘나’는 사라지고 다른 ‘나’, 말하자면 시 속의 ‘나’가 생긴다. 탄생한다. 그런 점에서 시 쓰기, 문학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나의 소멸, 나를 지우기, 지금 여기 있는, 그동안 있다고 믿어 온 나를 없애기, 결국 부재를 증명한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