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채광석은 ≪한국문학의 현 단계 II≫(창작과비평사, 1983)에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란 평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비평적 문제의식은 뚜렷하다. 그에게 문학은 미학적 성채에 갇힌 채 역사 현실과 절연된 그러한 문학과 거리가 멀다. 대학 시절부터 유신 정권의 폭압적 반민주주의에 대한 학생운동에 참여한 그에게 문학은 뒤틀린 역사 현실을 전복함으로써 이 땅에 사는 민중에게 인간 해방의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어떤 희망을 북돋우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정치, 현실, 역사, 민중, 민족 등은 문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채광석의 민중문학에 대한 입장은 <소시민적 민족문학에서 민중적 민족문학으로>란 문제적 평론에 집약돼 있다. 이 글에서 그는 1980년대의 진보적 성향의 민족문학이 “전문 문인들의 소시민적 민족문학과 기층 민중의 민중적 민족문학으로 분화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면서, “소시민적 민족문학의 극복과 민중적 민족문학의 확고한 정립 문제”가 절실한 과제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의 이 문제의식은 매우 핵심적인 것으로, 기실 1980년대도 1970년대 못지않은 진보적 문학이 치열히 궁리되고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 방향은 노동자, 도시 빈민, 농민과 같은 기층 민중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한 문학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민중적 민족문학은 1970년대의 민족문학이 거둔 성과를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한 문학적 고투의 산물인바, 민중성의 참다운 획득이야말로 그가 치열히 펼친 문학운동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 아래 채광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논의된 제3세계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민중 지향성 내지 민중과의 일치, 민중의 진정한 해방을 그 역사적 과제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3세계 리얼리즘의 선진성과 전위성이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그러면서 “서구 모더니즘 문화의 개인주의적, 내면적, 소외적 퇴폐가 근원적으로 서구의 시민사회가 부르주아지 지배권의 확립과 더불어 그 이념의 민중성을 허구화시키고 반민중적 사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길로 달리게 된 데 기인한다”고 하여, 제3세계의 민중성과 괴리된 서구 모더니즘의 실체를 예각적으로 비판한다.
그에게 민중민족문화는 어디까지나 민중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실질적 의미를 띠는 것, 즉 운동과 문화의 역동적 결합의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지, 운동과 괴리된 문화의 개별적 영역 차원에서 고려되는 각 문화 예술의 고유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진전을 위한 민중에 기반을 둔 운동과 이를 문화 예술적 차원에서 적극 실천하기 위한 노력들이 역동적으로 결합되는 관계성에 의한 민중민족문화(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0자평
1980년대 문학운동의 최전선에서 채광석은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의 몫을 수행했다. 말 그대로 ‘불의 시대’의 복판에서 반민중적·반민족적·반민주적 질곡의 역사와 맞서 싸운 야전 사령관이었다. 1980년대의 한국문학사에서 채광석의 존재는 그 자체가 민중적 민족문학을 표상하는 뜨거운 상징이다.
지은이
채광석은 1948년 충남 태안군 안면읍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평론가를, 2학년 때는 언론인을 희망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문필가의 꿈을 키웠다. 게다가 중학 시절 역사 공부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처럼 글쓰기 자질을 갖추고 역사 공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짐으로써 이후 1980년대 민중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로서 기초 소양을 튼실히 다졌다. 그는 대전고 재학 시절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로 빚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바, 관념으로서 역사가 아닌 실천으로서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처럼 청소년 시절에 튼실히 배양된 역사의식은 그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한 이후 ‘독서회 사건’과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을 목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지도록 했다. 이 무렵 그는 신동엽 시인을 민족의 역사 인식을 깨닫게 해 준 민족시인으로서 각별히 존경한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애송했다. 1960년대 후반 채광석의 대학 시절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반민족적 3선 개헌으로 들끓었고, 그는 학내의 이념 서클 활동과 야학 지도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19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 필화 사건과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을 보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체제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국가의 대학생 병영화를 위한 교련에 대한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어 강제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군 제대 후 박정희 정권의 초헌법적 긴급 조치 시대 속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 시위’ 계획을 후배 및 동료와 함께 세우고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캠퍼스 안에서 반독재 민주주의를 향한 추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오둘둘 사건’으로 채광석은 실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출소 후 1978년 신용협동조합에 입사하였고, 대학 시절 ‘반달’ 모임에서 만난 강정숙과 결혼하였다. 신용협동조합 시절 ≪창작과 비평≫의 독자 투고에서 “한 편의 시마다에 민중의 삶을 드러내며 민중의 시대를 당겨오는 거점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시인의 민중 의식이란 일종의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고 하여, 이미 민중민족문학 계열의 문학평론가로서 전문가적 견해를 보였다.
1980년 5·17 쿠데타에 앞서 주도면밀하게 세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긴급체포되었다. 석방 이후 무크지 ≪시와 경제≫ 활동에 동참했다. 1982년 ≪시와 경제≫ 2집 때부터 활동에 가담하면서 문학을 통해 시대의 역사 현실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하여 1983년 2월에는 김정환의 장편 연작시 ≪황색 예수전≫ 1권에 해설을, 3월에는 ≪한국문학의 현 단계 II≫에 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5월에 창간된 무크지 ≪시인≫에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외 네 편을 발표하였다. 이 문학 활동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시와 경제≫ 2집에 노동자 박노해의 <시다의 꿈> 외 다섯 편의 시를 소개한 것이다. 이후 채광석은 진보적 출판사인 풀빛출판사의 풀빛 판화시선을 기획하여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을 출간했다. 이 외에도 혁명 전사 김남주의 시집 ≪진혼가≫(1984)를 청사민중시선으로 출간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84년 신용협동조합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 문학운동에 출사표를 던졌다. 무엇보다 1984년 민족문화운동협의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을 필두로, 진보적 동료·후배 문인들을 중심으로, 1970년대에 설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1980년대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대중적 문인 조직으로 재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창립된 지 1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그가 직접 작성한 <84 문학인 선언>이 채택되었고, 그를 총무 간사로 한 자유실천문인협회의회가 재창립되었다. 이후 그는 재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특유의 활력으로 1985년에 시집 ≪밧줄을 타며≫(풀빛), 사회평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청년사)을 출간하는 등 대학교의 시국 및 문학 강연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화예술분과 위원장을 맡으면서 전국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문학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지역의 문학 현장을 직접 호흡하면서 지역문학운동의 중요성을 지역 문인들과 함께 고민하였고, 각 지역의 구체적 현실에 걸맞은 지역문학운동을 활발히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 그는 가히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황지우)이며, “‘한국민족문학사’의 뚝심 건장한 농부”(김준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격정 속에서 7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여성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민주 시민 대동제’에 참석하여 ‘민문연’ 노래패 후배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토론을 벌인 후 이튿날 새벽 두 시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 앞 아현동 대로상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7월 그의 문학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한마당)이 출간되었고, 그의 1주기에 ≪채광석 전집≫(풀빛) 1권(시)과 2권(산문)을, 2주기에 3권(서한집), 4권(문학평론집), 5권(사회·문화평론집) 등 전 5권의 간행을 완료하였다. 2000년 7월 시인 채광석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그의 고향 안면도 송림공원에 건립되었다.
엮은이
고명철은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쟁점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비평사와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199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 세계>가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리얼리스트≫ 및 계간 ≪실천문학≫, ≪리토피아≫ 편집위원을 지냈고, 현재 반년간 ≪바리마≫ 편집위원으로서 유럽 중심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문학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칼날 위에 서다≫, ≪비평의 잉걸불≫, ≪1970년대의 유신 체제를 넘는 민족문학론≫, ≪‘쓰다’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소시민적 민족문학에서 민중적 민족문학으로
제3세계 속의 리얼리즘
민족문학과 민중문학
민중·민족문학의 확대 심화로서의 지방문학운동
노동의 새벽
민족시인 신동엽
진정한 새로움을 위하여
민중문화운동의 방향
찢김의 문화에서 만남의 문화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덧붙이건대 우리 민중·민족문학의 실체는 무슨 지방 문학 무슨 지방 문화라는 상투적이고 지방주의적인 말놀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울 지방문학이든 광주 지방문학이든 그 가운데서의 ‘민중·민족문학의 전진적인 움직임’을 공유하고 더욱 진전시키려는 치열한 실천적 민중 의식에 의해서만 보다 풍요해진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민중·민족문학의 확대 심화로서의 지방문학운동>
이 주체적 일어섬과 하나 됨을 향한 민족적 열망과 이 열망의 실현을 위한 민족적 움직임을 우리는 민족운동이라고 부르며, 이 운동의 역사적 주체가 민중이고 마땅히 민중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민중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민중민족문화는 민중민족운동의 문화일 수밖에 없다.
―<찢김의 문화에서 만남의 문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