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호철 작품집
간밤 내내 판문점이라는 곳이 풍겨주는 이역감은 니깃니깃한 기름기로서 소용돌이를 쳤다. 판문점이 중유 같은 물큰물큰한 액체더미가 되어 우르르 자갈소리를 내면서 몰려오기도 하고 뭉틀뭉틀한 바위더미로서 우당탕거리며 달아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판문점이 상투를 한 험상궂은 노인이기도 했다. 싯뻘건 두루마기를 입고 가로 버티고 서서 이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호되게 매를 맞은 일이 있는 국민학교 四학년 때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밤새 판문점에서 쫓겨 다니는 꿈을 꾸었다.
<판문점>, ≪초판본 이호철 작품집≫, 이호철 지음, 백지연 엮음, 31쪽
꿈이 왜 이런가?
다음 날 판문점을 구경 가기로 했다. 그 공간의 이역감(異域感)이 꿈으로 나타났다.
현실은 어떤가?
다음 날 그곳에서 당사자인 남과 북의 사람들보다 외국 기자들이 중심에 선 것 같은 묘한 상황을 보았다. 꿈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장면이었다.
판문점은 어떤 공간인가?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곳이지만 소시민들에게는 기억의 흔적으로만 남은 공간이다. 주인공 진수는 판문점을 ‘부스럼’에 비유한다.
왜 부스럼인가?
“판문점은 분명 ‘板門店’이었다. 그리고 해괴망칙한 잡물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가슴팍에 난 부스럼과 같은 것이었다. 부스럼은 부스럼인데 별반 아프지 않은 부스럼”이라는 구절을 보라. 처음에는 끔찍한 고통의 현실이었는데 일상에서 점점 희석되는 역사의 기억을 의미한다.
판문점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현실의 위력이다. 그것은 분단의 상처마저도 희미하게 만든다. 작가는 전쟁과 분단 체험의 주관적 기억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의 시선을 보여 준다.
분단의 상처가 희미해진 현실이란 어떤 것인가?
진수의 형과 형수가 나누는 일상 대화를 보라. 그들은 진수가 판문점을 방문한다고 해도 무관심하다. 그들이 골몰하는 것은 부의 축적과 일상의 안위다. 분단 현실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진수는 이들에게 ‘이역감’을 느낀다.
이역감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중산층의 속물 의식에 동조할 수 없는 비판적인 자의식과 이곳에서 발생되는 감정이다.
비판하는 자의식에게 희망은 있는가?
진수가 북한 여기자와 사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 분단의 벽이 잠시나마 허물어지는 순간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세속적 삶 속에 희석되는 역사 인식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가 있지만 더불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소통과 교류도 강조된다.
진수와 여기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는 북한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여기자는 물신주의가 팽배한 남한 사회의 방종과 무질서를 비판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닫혀 있는 북한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물질적 풍요와 가족적 일상의 안온함에만 가치를 두는 남한 중산층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분단은 이호철의 소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실향 체험과 분단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각은 이호철 소설의 지반을 형성한다. 실향민으로서 남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척박함과 치열한 생존 의식은 그의 소설의 원체험으로 자리한다.
소설의 특징은?
실향민의 체험에서 출발한 이호철 소설은 전쟁 상황의 참혹함과 분단 현실의 자각을 폭넓은 층위에서 탐구했다. 다양한 인물 군상의 객관적인 형상화를 통해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소설의 시선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호철은 어떻게 살았나?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다. 월남 후 부두 노동자, 제면소 조수, 미군 부대 경비원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1955년, 1956년에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과 <나상>이 추천되었다. 1974년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2004년 독일어로 번역된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 메달을 수상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지연이다. 경희대와 단국대에서 강의한다.
2686호 | 2015년 7월 16일 발행
남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소설가
백지연이 엮은 ≪초판본 이호철 작품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