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육필시집 사과야 미안하다
가을의 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의 길도 서서히 식어 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 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니/ 시 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정일근 육필시집 사과야 미안하다≫, 136~139쪽
2748호 | 2015년 9월 19일 발행
이슬 한 방울의 무게,
풀은 겸허해지고 땅은 그윽해진다.
가벼워지기 위해 무거워지는 것.
가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