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말과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자신만의 상징 체계를 구축한 송찬호 시인의 육필시집입니다.
등단 30년을 눈앞에 둔 시인이 표제시 <쑥부쟁이밭에 놀러 가는 거위같이>를 비롯한 51편의 시를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습니다.
글씨 한 자 글획 한 획에 시인의 숨결과 영혼이 담겼습니다.
지은이
송찬호는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그림에 대한 꿈은 일찍 버리고 조금씩 시를 읽고 쓰다가 시인이 되었다.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과 동시집 ≪저녁별≫을 출간했고 김수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자서
여우 털 목도리
실연
초원의 빛
겨울
안부
봄
나비
분홍 나막신
냉이꽃
꽃밭에서
채송화
모란이 피네
장미
복사꽃
늙은 산벚나무
민들레역
검은 백합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어머니는 둥글다
동백이 활짝,
동백 열차
검은 머리 동백
산경(山經) 가는 길
향일암 애기 동백
동백
동백이 지고 있네
쑥부쟁이밭에 놀러 가는 거위같이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임방울
금동반가사유상
구두
촛불
가난의 빛
모닥불
거인의 잠
돌지 않는 풍차
역병이 돌고 있다
코끼리
봄의 제전(祭典)
백한 번째의 밤
도라지꽃 연정
산토끼 똥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머리 흰 물 강가에서
문(門) 앞에서
희생
뜨개질
뜨개질, 그 후
내가 낮잠을 자려 할 때
무제 3
송찬호는
책속으로
쑥부쟁이밭에 놀러 가는 거위같이
오늘도 거위는 쑥부쟁이밭에 놀러 간다야
거위 흰빛과
쑥부쟁이 연보랏빛,
그건 내외지간도 아닌 분명 남남인데
거위는 곧잘 쑥부쟁이 흉내를 낸다야
쑥부쟁이 어깨에 기대어 주둥이를
비비거나 엉덩이로 깔아뭉개기도 하면서
흰빛에서 연보랏빛으로 건너가는 가을의 서정같이!
아니나 다를까, 거위를 찾으러 나온 주인한테
거위 그 긴 목이 다시
고무호스처럼 질질 끌려가기도 하면서
그래도 거위는 간다야
흰빛에서
더욱 흰빛으로,
한 백 년쯤은 간다야
자서(自序)
몇 권의 시작 노트를 갖고 있지만,
이번처럼 펜에 잔뜩 힘을 주어
찬찬히 시를 옮겨 적기는 처음이다.
적어 놓고 보니, 글씨에 담긴 시들이
소풍 가는 아이들마냥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내년이면 시로 등단한 지 서른 해,
내친김에 이 육필시집이
내 시 쓰기의 오랜 열망과 고통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스스로
작은 위안으로 거듭나는 자리가 되기를.
2016. 4
송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