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통극의 이해
김충영의 ≪일본 전통극의 이해≫
느릿느릿 마음이 풀어지고
김충영은 일본 전통극 ‘노’를 구경한다. 들릴 듯 말 듯한 대사에 한없이 느린 동작을 보노라면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두 시간 남짓 그러나 공연장을 빠져나올 때의 개운함이란! 뭉친 마음이 풀리면 그곳에 일본 전통극이 있었다.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며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는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命)의 난폭한 장난질에 화가 나서 하늘에 있는 암굴에 들어가 바위 문을 닫아 버렸다. 태양신이 암굴에 틀어박히니 온 세상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졸지에 광명을 잃은 사람들은 겁에 질려 신에게 비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감해진 하늘나라의 여러 신들도 그녀를 달래 보려고 온갖 궁리를 다 짜내었다. 바위 문 바깥으로 그녀를 나오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 보려고 닭들을 모아 놓고 일제히 울려 보기도 하고, 거울이나 구슬 등 보물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우즈메노미코토라는 여신은 사철나무를 가발처럼 머리에 쓰고, 대나무 가지와 창을 양손에 들고, 나무통을 엎어서 그 위를 무대 삼아 박자에 맞춰 발을 쿵쿵 구르며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은 점차 고조되었고, 급기야 도취경에 빠진 광란의 춤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흔들어 대다 보니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마끈마저 느슨해져 치마가 허리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주위의 수많은 남신들은 다들 신이 나서 일제히 박장대소하며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그때까지 아무리 꾀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아마테라스오미카미도 이 대목에서는 마음이 동했다. 바깥이 궁금해진 그녀는 바위 문을 살며시 열어 내다보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지카라오노미코토(手力男神)라는 힘센 남신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채 힘껏 끌어냈다. 그러자 온 세상이 다시 밝아졌고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본 전통극의 이해≫, 김충영 지음, 13∼15쪽
원시 연극의 한 유형을 설명하는 대목인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하늘 바위 문 신화’다. 토라진 태양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치장을 하고 소도구까지 동원한 무대 공연에서 연극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원시적인 연극 형태라 할 수 있다.
≪일본 전통극의 이해≫는 어떤 책인가?
일본 전통극의 기원을 밝힌 뒤 그 3대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노(能), 분라쿠(文樂), 가부키(歌舞伎)를 해설했다. 장르별 주요 작품을 상세히 소개했다.
한국 책으로는 처음인가?
일본 전통극을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으로 정리해 소개하는 최초 저술이다.
노가 뭔가?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제아미가 완성한 가면극이다. 현실 세계를 반영한 겐자이노와 초현실적 세계를 다루는 무겐노, 두 가지가 있는데 무겐노가 훨씬 더 인기가 높았다.
가부키는 언제 시작되었나?
에도 시대 초기에 틀이 잡혔다. 사실적인 묘사로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 목표다. 남자 배우가 모든 역할을 소화해야 하므로 여자 배역을 맡은 배우는 여자처럼 치장하고 몸가짐도 최대한 여성스럽게 보이려 한다.
분라쿠는 인형극인가?
가부키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형극이다. 샤미센 반주에 맞춰 공연한다.
노와 가부키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부키의 주요 관객은 도시 서민이었다. 노는 귀족, 무사 등 상류층에서 즐겼다. 사실 묘사로 재미를 추구하는 가부키와 달리 노는 상징 묘사로 유현미를 살린다.
이 책에서 노에 대한 설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노가 일본 연극사에서 극 형태를 갖춘 최초 전통극이기 때문이다. 분라쿠나 가부키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예능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노는 어떻게 발전했나?
뜨내기 예능인의 잡스런 예능이었다. 간아미가 춤과 노래를 보태 상류층 기호에 맞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간아미의 아들 제아미는 한 걸음 더 나가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다. 현재까지 공연되는 노 작품 대다수가 그의 작품인 것만 봐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관객이나 독자에게 최대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궁극의 매력, 곧 ‘꽃’을 완성하려 애썼다. ≪풍자화전≫, ≪화경≫ 을 지어 ‘꽃’ 이론을 폈다.
≪풍자화전≫과 ≪화경≫은 비전이었나?
배우가 무대에서 최대의 매력을 꽃피울 수 있는 비법을 정리해 후계자에게 전하려 한 책이다. 비밀리에 전해진 까닭에 오랜 세월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1909년 요시다 도고 박사가 열여섯 작품을 발견해 ≪제아미십육부집≫으로 출간했다. ≪풍자화전≫ 등이 빛을 보게 된다.
노 발전에 쇼군 요시미쓰의 공헌은?
간아미 부자가 이끄는 노 극단은 당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던 야마토 지방 4개 극단 중 하나였다. 오미 지방에도 극단이 3개 있었다. 각처에서 극단이 생겨났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불가피했다. 쇼군 요시미쓰가 이마쿠마노에서 간아미들이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았다. 이후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판세는 간아미 극단으로 기울어졌다.
후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특히 제아미를 총애했다. 제아미는 쇼군과 동석해 축제를 관람하며 술잔을 하사받기도 했다고 한다. 일개 예능인이었다. 대단한 파격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쇼군에게 잘 보이려던 고위 무사들이 선물을 들고 제아미를 찾는 일도 잦았다. 당시 공경이었던 산죠 긴타다(三條公忠)가 일기 ≪후우매기(後愚昧記)≫에 “사루가쿠(猿樂)는 거지들의 소행임에도 그걸 즐기고 상찬하는 세태가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쓸 정도였다.
당신은 노를 보면 어떤가?
일본 유학 시절에 종종 노를 관람했다. 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리다. 배우는 낮은 음조로 대사를 읊조린다. 움직임도 느릿느릿하다. 상연 시간은 두 시간 남짓한데 졸음이 밀려온다. 맑은 정신으로 버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느 노 전문가에게 이런 사정을 털어놓자 그는 오히려 노를 제대로 감상하고 있다며 칭찬했다. 처음엔 그저 듣기에 좋으라고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마다 몸이 정화된 듯, 왠지 모를 개운함에 젖곤 했으니까.
노는 어떻게 당신을 신선하게 바꾸었나?
노 주인공은 대부분 집심(執心) 때문에 구제받지 못한 망령 신세다. 그들이 무대에서 집심을 토로하며 극이 진행된다. 이 때문에 노에서 망령의 한을 달래려는 진혼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관극을 통한 진혼 과정에서 관객은 영적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개운함도 그 때문인 듯하다.
분라쿠, 가부키가 어떻게 노를 대체할 수 있었나?
근세에 들어 도시 서민이 문화 전면에 나서 활약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 시기에 상업 활동을 기반으로 실력을 키운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들을 ‘조닌’이라 부른다. 이들은 무가 의전 행사에서 악극 형태로만 상연하는 노를 대신해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예능을 찾기 시작했다. 그 요구에 부응하면서 분라쿠와 가부키가 등장했다.
이 책은 어떤 작품을 소개하는가?
일본 전통극 역사에서 각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들만 소개했다. 노 대표작 <이즈쓰>는 아리쓰네의 딸이 망령이 되어서도 남편 나리히라를 못 잊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사연을 담았다. 분라쿠 <소네자키 신주>는 당대 유행처럼 퍼져 있던 젊은 남녀의 동반 자살 풍조를 소재로 했다. 가부키 <주신구라>는 ‘연극의 독삼탕’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한 흥행작이다. 아코한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극화한 것으로 주군의 원수를 갚고자 하극상을 일으킨 사무라이 이야기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무사 사회의 지독한 충심을 확인할 수 있다.
‘연극의 독삼탕’이 무엇인가?
독삼탕은 인삼을 넣어 달인 약이다. 식욕을 잃은 환자도 금세 생기를 되찾아 ‘기사회생의 명약’이라 했다. 관객이 없어 파리만 날리던 극단도 <주신구라>만 공연하면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런 별칭이 붙었다.
일본 전통극은 어떻게 계승되고 있나?
일본 예능인들은 ‘게이코’라는 것을 중시한다. 원래 ‘옛것을 공부한다’는 뜻인데, ‘부단한 연습을 통해 익히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전통극 무대에 서는 예능인들은 어릴 적부터 게이코를 통해 기예를 갈고닦는다. 일본인들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문화다. 한편 전통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각종 무형 문화유산을 예로부터 정해진 틀에만 한정해 양식화한 측면도 있다.
우리 전통극과 비교하면 무엇을 볼 수 있나?
우리가 문인 사회였던 데 비해 일본은 무사 사회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전통극에서도 문화적 차이가 느껴진다.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지만 공통점은 찾기 어렵다. 대신 차이점을 찾으며 양국의 전통적인 감각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는 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은?
원래 예능에 관심이 많았던데다 은사 추천도 있고 해서 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차차 분라쿠, 가부키 등 다른 분야로 관심 범위를 넓혀 갔다. 현재 주요 연구 분야는 노 작품론, 노 이론서 분석 등이다. 이를 토대로 앞으로는 작품 번역을 활발히 해 나갈 계획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충영이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