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분단 이후부터 4·19혁명 이전까지 한국문학에서는 소위 ‘순수문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회 현실의 갈등이나 모순을 다루는 작품들에 대해 정부는 불온시 했고, 작가들 대부분은 정부의 정책에 순응해 현실을 우회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을 드러내었는데, 이를 순수문학이라 칭하면서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바로 4·19혁명이었다. 1960년대에 순수-참여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면서 젊은 비평가들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리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나갔다. 하지만 문학 논리란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김정한의 작품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참여문학의 의미와 성과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로 주목받았고, 한국문학사에서 그는 분단 이후 참여문학의 기틀을 세우는 데 커다랗게 기여한 작가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김정한이 한국문학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마련해 나간 것은 <모래톱 이야기>(<문학(文學)>, 1966. 10)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논의를 하필 <모래톱 이야기>에서 끌어내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모래톱 이야기>로 건재를 알리기 이전까지 그는 절필을 유지하고 있었다. 1956년 9월 2일 <자유민보(自由民報)>에 발표한 <개와 소년(少年)>을 마지막으로 창작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십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189쪽)라는 <모래톱 이야기>의 첫머리는 시차 부분에서 변형이 가해지기는 했으나,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등단작 <사하촌(寺下村)>(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자신의 빼어난 능력을 이미 증명했지만, 이후 발표했던 작품들은 등단작의 성취에 미치지 못하는 감이 있다. 즉 <모래톱 이야기>로 재기하지 못했더라면 김정한은 역량 있는 작가로 우뚝하게 자신을 드러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정한 작품 세계의 특징은 단연 리얼리즘이다. 그만큼 그는 민중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대상으로 삼아 그 고난과 투쟁의 면모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데 탁월하다. 이는 곧장 한국문학의 성취로 직결되었는데,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6년이라면 1970년대 한국문학에서 리얼리즘의 꽃을 피운 황석영, 이문구, 조세희 등의 작가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거나 이제 막 등단한 시점이니, 그 의미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역사적인 경험과 맞물리면서 또 하나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식민지시대에 일제와 결탁해 민중을 억압했던 세력이 해방이 되어 청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력을 공고하게 구축해 가는 양상을 냉철하게 파악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할 당시 벌써 59세였다. 이는 연륜의 덕이기도 하겠지만 줄곧 민중의 관점에 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면모로 따지더라도 그는 발군의 작가라 이를 만하다. 친일 잔재 청산 문제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의제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는 특히 주목해야만 할 사항이다.
200자평
김정한의 소설은 리얼리즘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는 분단 이후 한국문학사에서 참여문학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작가로 민중의 시선에서 그들의 고난과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조선인이 조선인을 수탈하는 모습과 일제 권력에 기생했던 자들의 계속되는 승승장구 등 우리 역사의 비틀어진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지은이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은 1908년 음력 9월 26일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에서 세운 서당에 나가 한학을 배웠고, 1919년 열두 살이 되자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明正學校)에 입학했다. 입학 직후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는데,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식민지시대 항일 노선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1923년 열여섯 살 때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으나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학비를 탕진한 까닭에 유학 생활은 1년 6개월 만에 마감할 수밖에 없었고, 1924년 9월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동래고보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민족적인 울분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문학에 눈을 떴다고 한다. 1928년 3월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9월 울산 대현공립보통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했으나, 교원 생활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인 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차별 대우에 분개해 조선인교원연맹 결성을 추진하다가 피검되었고, 이를 계기로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따라서 스물 즈음까지 그의 의식을 거칠게나마 정리한다면, 굳건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해 자신의 세계를 지탱해 나갔다고 파악할 수 있겠다.
김정한이 애초 관심을 보인 문학 장르는 시였다. 예컨대 경상남도 양산에는 그의 외가와 왕고모 댁이 있었고, 1927년 스무 살에 양산의 조분금(趙分今) 씨와 결혼했는데, 이곳을 취해 <수라도>를 비롯한 여러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해 나간 것은 몇십 년이 지난 후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는 소설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양산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들을 문학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신 이때 몰두했던 것은 시 창작이었다. 1928년에는 목원(牧園) 혹은 김정한(金汀翰)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와 <조선일보>에 시·시조를 투고했으며, 1929년 10월부터 1930년까지는 목원생(牧園生), 김목원(金牧園), 김추색(金秋色)이라는 명의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시단>, <대조> 등에 다수의 시를 발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31년을 기점으로 해 그는 소설 분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11월 무렵 <구제사업>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잡지에 투고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결국 게재될 수 없었다고 훗날 술회했던 데서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시 창작으로 출발했던 김정한이 소설 분야로 나아간 까닭은 계급 사상의 영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계급/계층의 대립 구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는 시 장르보다는 소설 장르가 적합하다. 다시 말한다면, 각각의 계급/계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건을 구성하고, 이로써 현실의 갈등을 긴박하게 제시하는 데 맞춤한 장르가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가 계급 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은 일본 유학 때다. 192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0년 4월 와세다대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 문학부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독서회에 가입해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이찬, 안막, 이원조 등과 교류하며 계급 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31년 11월 결성된 동지사(同志社)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김정한이 품었던 계급 사상의 열도는 대단했다. 재일 조선인 예술 연구 단체인 동지사는 계급의식으로 뭉친 단체였다. 일본 유학을 그만두게 된 계기도 계급 사상과 관련이 있다. 1932년 3학년 여름방학 때 귀향한 후 농민 조직 활성화를 위해 사업을 펼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9월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 그의 처녀작 <그물(罠)>이 <문학건설>에 발표되었다.
학업을 중단한 후 김정한은 다시 교사가 되어, 1933년 9월부터 남해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했고, 1939년 5월에는 남해군 남명심상소학교로 발령받아 1940년 3월까지 교직을 이어나갔다. 그가 소설가로 등단한 것은 교직 생활을 펼쳐나가면서였다. 1936년 단편소설 <사하촌(寺下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거머쥐었던 것. 비참한 농촌의 현실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한편, 이에 편승하는 타락한 불교계의 한 단면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농촌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현실에 자각해 나간다는 관점은 다른 작가들과 크게 변별되는 요소였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하촌>이 사찰을 비방하는 소설이라고 하여 그는 장학사의 조사를 받았으며, 귀향했을 때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1940년 교직을 그만두고 난 후 김정한은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맡아 8개월여 간 운영도 해보고, 경남 면포조합에 서기로 취직해 사무도 보다가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정국에서 김정한은 좌익 계열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벌여나갔다. 1945년 경남인민위원회 문화부에서 활동했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회원으로 이름도 올렸으며,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에 이어 부산예술연맹위원회 회장에 피선된 전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의 활동으로 인해 김정한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46년 4월 미 군정은 이러한 활동을 ‘정부 행세’로 규정해 노백용(盧百容), 김동산(金東山) 등과 함께 그를 검거했으며,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사상 문제로 그를 체포했던 것이다. 그가 김동산으로부터 ‘요산(樂山)’이라는 아호를 받은 것은 1950년 8월 감옥 안에서였다. 아호 요산에는 ‘오래도록 지조를 지키며 살아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후 김정한이 보여준 삶의 궤적을 보면, 아호 ‘요산’처럼 살아나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화를 향한 방향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아갔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 통일운동을 역설하고, 민주화운동을 옹호하는 등 수차례 강연을 했다가 1961년 군사 쿠데타를 만나 쫓겨 다녔고, 예순일곱 살이었던 1974년에는 개헌 촉구 서명에 나섰으며, 1985년 5·18민주혁명 기념사업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1987년 6월에는 개헌 촉구 33인 시국선언에 동참했고,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으로 뽑힌 바도 있다.
마지막까지 아호 요산에 담긴 의미를 지켜 나갔던 김정한은 1996년 11월 28일 타계했다. 살아서 그가 꿋꿋하게 이어온 삶의 궤적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엮은이
홍기돈은 1970년 제주에서 출생했다. 1999년 평론 <그림자로 놓인 오십 개의 징검다리 건너기-한강론>으로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고, 2004년 중앙대학교에서 <김동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백의출판사, 2001), ≪인공낙원의 뒷골목≫(실천문학사, 2006)이 있으며, 연구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소명, 2007)을 펴내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인간단지(人間團地)
수라도(修羅道)
모래톱 이야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라 땅, 남의 땅을 함부로 먹다니! 그건 땅을 먹는 게 아니라, 바로 ‘시한폭탄’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제 생전이 아니면 자손 대에 가서라도 터지고 말거든! 그리고 제아무리 떵떵거려대도 어른들은 다 가는 거다. 죽고 마는 거야. 어디 땅을 떼 짊어지고 갈 수야 있나. 결국 다음 이 나라 주인인 너희들의 거란 말야. 알겠어?”
-<모래톱 이야기>,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