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이 엮은 ≪김요섭 동화선집≫ 꽃은 불이다 꽃은 손을 대도 데지 않는 불이고 이슬 한 방울에도 놀라는 불이지만 태양도 꺼트리지 못하는, 별빛의 씨가 땅 위에서 눈을 뜬 강인하고 영원한 불이다. 기관차의 굴뚝에서는 쟈스민의 향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향기가 연기 대신 푹푹거리고 토해졌읍니다. 그 까닭은 이 기관차가 끌고 가는 화물이 꽃짐이기 때문이라고요! …
매미 울음 끝에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 듯 쟁쟁쟁 天地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
한하운이 쓰고 고명철이 엮은 ≪초판본 한하운 시선≫ 보리피리의 황금 선율 한센병은 하늘의 벌이라 인정이 없다.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편견의 종신형이다. 하운이 인간폐업을 마치고 감옥 문을 나설 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보리피리다. 자연의 축복, 생명의 노래가 시작된다.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둘리네 山도 언덕도 나무가지도 여기라 뜬세상 죽음에 主人이 …
열어구(列禦寇)가 쓰고 김영식이 옮긴 ≪열자(列子)≫ 나누지 말라, 하나인 것을 왜? 이런 단어는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존재에 대한 참혹한 의지가 없다면 이런 질문은 불가능하다. 왜냐고 묻는다. 묻기 시작하면서 묻지 않는 이유를 잊었다. 동곽(東郭) 선생이 말했다. “당신의 몸도 도적질해 온 것이 아닙니까? 음양의 조화를 도적질해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육체를 이루었는데, 하물며 그 …
홍순석이 엮고 옮긴 박은의 ≪읍취헌 문집(挹翠軒文集)≫ 바람은 저 홀로 슬퍼하고 먹구름 낮게 깔리자 새소리 더욱 소란하다. 바람이 몸을 던져도 늙은 나무는 대답이 없다. 한바탕 천둥 치고 비 내리면 나무는 나무, 새들은 새들, 바람은 저 홀로 슬프고. 복령사 가람은 본시 신라의 옛 절로 천불은 모두 서축에서 모셔 왔네 신인이 대외에서 길 …
어순아가 옮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야간 비행(Vol de nuit)≫ 밤에 관한 최초의 추억 야간 비행에서 지상은 하늘이 된다. 집에서는 불빛이 새어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오고 비행사는 가족의 저녁 식탁 대화를 듣는다. 하늘에는 길이 없다. 대지를 방랑하는 순례자처럼 야간 비행사는 별과 나침반 그리고 사유의 길을 걷는다. 저 멀리서 희망을 주는 …
시골집에서 더위 피하는데 시골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한 말 술이 있으니 누구와 즐길까. 이런저런 산과일 펼쳐놓고 듬성듬성 술잔을 놓았노라. 거친 갈대로 자리를 대신하고 파초의 잎으로 그릇을 삼았네. 취한 다음에 턱을 괴고 앉으니 수미산이 탄환보다 작구나. 田家避暑月 斗酒共誰歡 雜雜排山果 疏疏圍酒樽 蘆莦將代席 蕉葉且充盤 醉後支頤坐 須彌小彈丸 수미(須彌): 수미산. 불교에서 말하는 온 우주의 중심에 있는 …
조성애가 옮긴 에밀 졸라(Emile Zola)의 ≪쟁탈전(La Curée)≫ 지나치게 조숙한 인간 ≪쟁탈전≫의 초안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야심과 욕망의 혼란, 식욕과 야심의 대향연, 투기의 광태, 조숙한 젊은이들의 어리석고 방탕한 생활, 극도의 사치, 지나치게 조숙한 머리와 육체 때문에 타락하는 사람들.” 그가 “극도의 정확성과 놀랄 만한 입체감”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조성애는 …
이재희가 옮긴 조르주 상드(George Sand)의 ≪상드 동화집(Contes de George Sand)≫ 남성을 정화하는 여성 상드의 동화는 가난 무지 불우한 어린 인간이 대자연을 통해 사랑 진정 슬기를 구하는 이야기다. 남성이 만든 힘과 투쟁의 세계에서 여성의 정과 사랑은 인간을 안으로부터 발전시킨다. 그제서야 문명의 불은 화재가 아니라 화덕의 이름을 얻는다. 어머니를 지켜드리고 싶었고, 복수하고 …
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청명한 여름날 저녁을 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청명한 여름날 저녁을, 빛의 계곡이 황금빛 서녘으로 쏟아져 내리는, 은빛 구름들이 모든 하찮은 생각들을 저 멀리, 멀리 남겨 놓고서, 조그만 걱정거리에서 즐거이 벗어나 상쾌한 산들바람에 조용히 쉬는, 자연의 아름다운 옷을 입은 향기로운 황야를 심심풀이 삼아 탐구하고 거기서 내 영혼을 …
休戰線에서 神이여. 어떻게 당신에게 매달려 간구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天地를 뛰짚고 怒濤 치며 무수한 生靈들이 피와 주검의 처절한 相으로 여기에 불살린 다음 겨우 다시 無言한 本然의 姿勢를 도리킨 山이며 구름이며 樹木이며 時間들이 짓는 적막한 空白 뒤에 숨기어 더욱 증오와 살륙을 노리어 총검을 갈고 있는 이 악착스런 人間의 事件인즉 惡鬼가 도야지 속에 …
나민애가 엮은 ≪초판본 신석초시선≫ 서러워, 모두 다 사라질 것이니 한학에서 시작했다. 시전과 당시를 익혔다. 그러고 서양 시를 만났다. 발레리와 그리스를 읽었다. 다시 되돌아와 향가와 고려가사와 시조를 듣는다. 몸은 늙고 정신은 유순하다. 다 사라졌고 길 잃지 않아 돌아왔다. 서러라! 모든 것은 다라나 가리 −포올·봐레리이 翡翠! 寶石인 너! 노리개인 너! 아마도, 네 …
귀양객을 방문해 봄 지나자 산의 꽃도 지는데 두견이 사람에게 돌아가라 하네. 하늘가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이 나는 흰 구름을 부질없이 바라보았던가. 訪謫客 春去山花落 子規勸人歸 天涯幾多客 空望白雲飛 ≪청허당집(淸虛堂集)≫, 휴정(休靜) 지음, 배규범 옮김, 79쪽 그의 또 다른 법호는 서산(西山)이었다. 해가 지는 곳. 하늘 가까이로 만물이 깃든다. 이승의 삶이 귀양살이라면 봄날이 간들, 산꽃이 진들 …
가족극장 5. 미셸 트랑블레Michel Tremblay의 <<매달린 집La Maison suspendue>> 그들은 끝없이 흔들린다 빅투아르와 조자파는 친구이면서 애인이다. 남매이면서 부부다. 근친상간 관계다. 세상의 눈을 피해 산골, 뒤아멜에 산다. 이 집에서 1950년 알베르틴과 에두아르 남매 이야기, 1990년 장 마르크와 그의 동성 연인 마티외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이들의 가족 관계가 서서히 드러난다. …
송영호가 안내하는 ≪초판본 장만영 시선≫, 유년의 모더니즘 장만영은 1930년대 우리 시단의 거의 모든 얼굴을 담고 있다. 현대의 언어로 전통의 기억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 시인을 세상은 전원적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라면 그곳에 미래는 없다. 生家 누륵이 뜨는 내음새 술지김이 내음새가 훅훅 품기든 집 방마다 광마다 그뜩 들어차 있는 …
우화한 세계 4. ≪장끼전≫ 귀가 있어도 기러기가 물 위를 날 때 갈대를 무는 것은 장부가 근신하는 것과 같고, 천 길을 나는 봉황이 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는 것은 군자가 염치를 지키는 것과 같다. 까투리의 간곡한 설득과 애원에도 장끼는 요지부동, 제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귀가 있어도 들을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