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사 천줄읽기
2486호 | 2015년 3월 11일 발행
김정아가 안내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도박사≫
김정아가 옮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의 ≪도박사(Игрок) 천줄읽기≫
집중과 몰입의 한계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생생하고 강렬한 감정, 권력,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
도박은 집중과 몰입의 순간이다.
그러나 순간일 뿐, 사랑이 없이는 지옥의 시작일 뿐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망쳐 버렸습니다. 사실 당신은 재능도 있었고, 성격도 밝았고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이나 인재를 필요로 하는 당신의 조국에도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남을 것이고, 그렇게 당신 인생도 끝장이 날 겁니다.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모든 러시아인들이 그렇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룰렛이 아니라면, 그 비슷한 어떤 다른 것이 있겠지요. 예외는 극히 드뭅니다.”
≪도박사 천줄읽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189~190쪽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가?
한때 친구였던 영국 신사 애스틀리가 주인공 알렉세이를 찾아와 말하는 중이다.
주인공 알렉세이는 누구인가?
똑똑하지만 가난한 귀족 청년이다. 장군 집 가정 교사로 있었지만 도박으로 폐인이 됐다. 빚 때문에 감옥에도 다녀왔고 하인 노릇도 했다. 지금은 거지나 다름없다.
도박을 시작한 동기가 무엇이었나?
사랑하는 여인 폴리나는 고리대금업자에게 갚을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을 만들어 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도박이었다.
바로 다 털린 것인가?
아니다. 처음엔 큰돈을 딴다.
연인의 빚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리되지 못했다. 폴리나는 그의 안중에서 사라진다. 도박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박은 무엇인가?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생생하고 강렬한 감정, 권력,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불만스러운 현실에 대한 탈출구다.
불만스러운 현실이란?
실패한 사랑과 무기력한 자신이다. 그는 대학 박사 후보생이고 3개 국어를 구사한다. 게다가 귀족이다. 그러나 조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기껏해야 코흘리개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능력이 있는데 왜 일이 없나?
지식인이 능력을 발휘할 길은 막혀 있었다. 19세기 러시아는 전통과 서구, 과학과 신이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시대 문제인가?
“모든 러시아인들이 그렇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애스틀리의 말을 기억하라. 개인의 무기력과 소외, 낮은 자존감은 청년 실신의 시대인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박으로 청년 실신의 문제가 해결되나?
그의 인생은 끝장났다. 돈이나 권력, 도박은 구원이 될 수 없다.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계약일 뿐이다.
구원은 어디 있나?
진정한 사랑에 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를 통해 구원받듯이,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가 그레첸을 통해 구원받듯이. 알렉세이는 구원의 여인인 폴리나를 잃었기 때문에 파멸한다.
왜 도박을 작품 소재로 채택한 것인가?
아마도 그에게 가장 친숙한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이 도박 중독이었다.
자전 소설인가?
그의 작품 가운데 실제 사건에서 소재, 테마, 디테일을 가장 많이 가져온 작품이다. 그가 집필 직전 경험한 도박 중독과 운명적 사랑이 작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 열정, 열등감, 굴욕, 비참, 증오, 승리감, 제어할 수 없는 중독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 책은 원전에서 얼마나 발췌했나?
20% 정도다. 가장 주제가 잘 드러난 장면을 뽑아 옮겼다. 작품 이해를 위해 생략한 부분은 내용을 요약해 제시했다. 작가의 상징이나 러시아 문화, 도박 용어 등에는 상세히 주석을 달았다.
발췌본의 미덕은 무엇인가?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부담스러운 독자가 그를 만날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이 책에서 만나는 작가는 거대한 철학과 사상으로 우주적인 고통에 괴로워하는 형이상학적 인물이 아니다. 돈이 없어 절절매고,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로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갖지 못하는 사랑에 애달아하는 살아 있는 19세기의 청년이다. 발췌와 주석이 현대 한국인이 러시아의 대문호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당신은 누군가?
김정아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