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눈먼 부친을 위해 임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행위는 효(孝)인가, 불효(不孝)인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으니 지극한 ‘효’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내몰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막대한 ‘불효’이기도 하다. 《효경(孝經)》에 의하면 효의 기본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즉,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가 물려준 것’이어서 부모가 물려준 몸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심청이는 부모가 물려준 귀한 몸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이야말로 불효막심한 것이다. 그런데 심청의 행위를 불효로 규정짓다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하늘이 낸 큰 효녀” 심청이가 어찌 불효인가?
유교적 윤리 규범의 잣대로 따지다 보면 부모가 물려준 몸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효’의 입장과 부친을 위해 임당수에 뛰어드는 고귀한 자기희생은 개념상 서로 충돌한다. 심청의 행위는 봉건적 윤리 규범인 ‘효’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으로 이해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젖동냥을 해 키워 준 눈먼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인 보답, 더할 수 없는 육친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청의 자기희생과 환생은 묘하게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에 찬 예수의 삶과 부활을 닮았다. 예수의 삶과 부활이 그러한 것처럼 심청은 지극히 고귀한 천상의 세계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모진 고난을 겪었다. 모진 고난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희생을 감행하는 순간이다. 임당수에 뛰어든 심청이는 용궁에 환생한다. 이후로는 영광의 꽃길이 펼쳐진다. 용궁에서의 환생이 앞으로 펼쳐질 영광된 삶의 서막이라면 부녀 상봉과 심 봉사의 개안(開眼)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아버지와 다시 상봉한 심청이는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 궁녀들을 물리치며 심 봉사에게 와락 뛰어든다. 눈이 뿌옇게 구름 낀 것처럼 자욱하던 심 봉사는 순간 활짝 하고 눈을 뜬다. 심청이의 고귀한 자기희생이 기적적인 구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 이해조의 판소리 개작 소설 4종을 동시에 소개합니다.
《춘향전》을 개작한 《옥중화(獄中花)》(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심청전》을 개작한 《강상련(江上蓮)》(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흥부전》을 개작한 《연의 각(燕의 脚)》(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토끼전》을 개작한 《토의 간(兎의 肝)》(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200자평
신소설 작가로 알려진 이해조는 널리 구연되고 있던 대표적인 판소리 4작품〈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을 산정(刪正)해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 안에서 활자화했다. 듣기 텍스트를 읽기 텍스트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강 위의 연꽃’이라는 뜻의 《강상련(江上蓮)》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임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이야기 《심청전》을 새롭게 개작한 작품이다. 1912년 3월 17일부터 4월 26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옥중화》와 함께 근대 문학기 활자본 고전소설이 성행하는 발판을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지은이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친일 개화 노선을 지향한 이인직(李人稙, 1862∼1916)과 달리 애국 계몽 노선을 표방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10대 손으로, 이철용(李哲鎔)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이며, 필명은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등을 사용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목되는 작품인 《자유종(自由鐘)》(1910)은 봉건 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 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 풍속의 개량 등 계몽 의식이 두드러진다.
처첩 문제, 계모의 박해 등을 보여 주는 《빈상설(鬢上雪)》(1908)·《춘외춘(春外春)》(1912)·《구의산(九疑山)》(1912)이나 미신 타파를 내세운 《구마검(驅魔劍)》(1908), 일반적인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에 중점을 둔 《화세계(花世界)》(1911), 《원앙도(鴛鴦圖)》(1911), 《봉선화(鳳仙花)》(1913) 등 36편의 작품을 발표해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모두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 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 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 의식과 계몽 의식을 담고 있다.
특히 1912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의 판소리를 명창 박기홍(朴起弘) 조(調)나, 심정순(沈正淳)의 창(唱)을 듣고 각각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 각(燕의 脚)》, 《토의 간(兎의 肝)》 등으로 산정(刪正)해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판해 ‘활자본 고소설(이야기책)’의 유행을 주도했다.
옮긴이
권순긍(權純肯)은 1955년 경기도 성남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고전문학 전공)를 받았다. 경신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93년~2021년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한국어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세명대 명예교수로 있다.
‘이야기’를 좋아해 40년 넘게 고전소설을 연구해 왔으며, 한국고소설학회, 한국고전문학회, 우리말교육현장학회 회장을 두루 지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검정심의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2008년∼200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ELTE)대학교 한국학과 초빙 교수를 지냈다.
우리 고전소설을 연구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과 고전의 다양한 콘텐츠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활용하는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역사와 문학적 진실》(1997),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2000),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2005), 《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2007), 《살아 있는 고전문학 교과서》(공저, 2011), 《한국문학과 로컬리티》(2014), 《고전소설과 스토리텔링》(2018), 《헌집 줄게 새집 다오》(2019) 등의 책을 썼으며,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의 고전소설을 쉽게 풀어 펴냈다.
2022년 〈《춘향전》의 근대적 변개와 정치의식〉으로 이주홍문학연구상을 수상했다.
차례
제1장 어화둥둥 내 딸이야
제2장 여보 마누라, 날 버리고 어디 가오
제3장 젖동냥으로 키우고, 밥 빌어 봉양하고
제4장 공양미 삼백 석에 눈을 뜬다면
제5장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제6장 임당수에 떨어지는 꽃 한 송이
제7장 용궁 간 심청, 뺑덕어미 만난 심 봉사
제8장 연꽃에 담겨 생환해 황후가 되니
제9장 맹인 잔치 가는 길, 멀고도 험하구나
제10장 부녀 상봉하고 눈을 뜨니
해설 : 눈먼 아버지를 위한 자기희생과 구원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이 마을 사람으로 우리 부친 눈이 멀어 세상을 분별 못하기에 평생에 한이 되어 하느님께 빌던 중 몽운사 화주승이 공양미 삼백 석을 불전에 시주하면 눈을 떠서 보리라 하되, 가세가 가난하여 주선할 길 없삽기로 내 몸을 팔아 소원 빌기 바라오니 나를 사는 게 어떠하오? 내 나이 십오 세라, 그 아니 적당하오?”
(…)
(심) “아버지, 진지 많이 잡수시오.”
(봉) “오냐, 많이 먹으마. 오늘은 특별히 반찬이 매우 좋구나. 뉘 집 제사 지냈느냐?”
심청이 기가 막혀 속으로만 흐느껴 울며 훌쩍훌쩍 소리 내니, 심 봉사 물색없이 귀 밝은 체 말을 하며,
“아가, 너 몸이 아프냐? 감기 들었나 보구나. 오늘이 며칠이냐? 오늘이 열닷새지?”
부녀 천륜이 중하니 몽조가 어찌 없을쏘냐? 심 봉사가 간밤 꿈 이야기를 하던 것이었다.
“간밤에 꿈을 꾸니 네가 큰 수레를 타고 한없이 가보이니, 수레라 하는 것은 귀한 사람 타는 것이라. 아마도 오늘 무릉촌 승상 댁에서 가마 태워 가려나 보다.”
심청이 들어 보니 자기 죽을 꿈이로다. 아무쪼록 안심토록,
“그 꿈이 장히 좋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