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험과 예측(Experience and Prediction)》은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인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가 집필하여 1938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독일에서 20세기 초반의 수학과 물리학 지식을 오랫동안 철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라이헨바흐는 유대인이었으며 기술자가 되기 위해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한 후 곧 과학철학으로 전향했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 세미나를 수강한 후, 1920년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상대론 속 시간과 공간의 인식론적 의의를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이 시기에 현대 수학과 양자 이론의 발전이 갖는 철학적 의의 또한 연구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라이헨바흐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경험주의’를 주장한 철학자에 속한다.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영국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을 들 수 있다. 흄은 외부 세계에 대해 인간이 구성하는 객관적인 지식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각 지각에 기초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지각은 인간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은 흄과 같은 경험주의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그 속에 20세기 초반까지의 수학과 물리학 발전을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석한 결과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독창적인 저서다.
철학과 과학의 전문화 경향이 심해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려워진 현 시대에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집필된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라는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집필된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저자인 라이헨바흐가 플랑크(Planck), 힐베르트(Hilbert), 아인슈타인(Einstein), 보어(Bohr),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슈뢰딩거(Schroedinger) 등 20세기의 수학과 물리학을 상징하는 학자들과 활발한 의견 교환을 통해 정밀과학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수행한 바 있기에, 이 책에서 제시되는 견해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면밀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20세기 이후에도 철학과 과학의 성공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함을 보여 주는 훌륭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라이헨바흐의 초기 과학철학에 관한 심층적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가 드물었는데,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 연구, 논리경험주의의 시간과 공간 철학이 갖는 의의 연구 등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역자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엄밀히 번역했다.
200자평
20세기 초반까지의 수학과 물리학 발전을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석한 결과를 담고 있는 과학철학의 고전이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유럽 철학 사조인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자인 저자가 정밀과학 분석의 성과들을 집약하고 체계화한 ‘논리경험주의의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의 전문화 경향이 심해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려워진 시대에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집필된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라는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189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술자가 되기를 꿈꾸어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공학이 스스로의 지적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공을 변경했다. 라이헨바흐는 수학적 확률 이론을 물리적 세계에 적용하는 문제를 주제로 삼아 박사학위를 받았다(에를랑겐 대학, 191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몇 년 동안 통신회사에서 공학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계속했다. 1919년경 베를린 대학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첫 세미나에 참석한 것은 그를 다시 철학계로 돌아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연철학 교수로서 라이헨바흐는 당대의 자연과학자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나누며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이른바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에 나치로부터 추방되기 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에 적용될 수 있는 확률 이론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당시 열띤 논쟁의 주제였던 양자 이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 또한 진행했다. 나치의 정치적 압력을 피해 1933년부터 5년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 철학과 학과장을 맡은 라이헨바흐는, 이 시기에 자신 고유의 확률 이론과 기호 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이러한 작업의 결실은 《확률론》, 《기호논리학 기초》에 담겨 있다.
미국의 철학자 찰스 모리스(C. Morris) 등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193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철학과에 재직하게 된다. 1953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철학적 탐구를 진행했다.
옮긴이
강형구(姜亨求, 1982∼)는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산행을 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영재학교) 8기로 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며 과학의 역사와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01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진학해 철학을 전공하여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육군 학사장교 46기(정보통신병과)로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현 과학학과)에 진학,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자인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을 연구한 논문 〈라이헨바흐의 ‘구성적 공리화’ − 그 의의와 한계〉로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2011년 2월).
2012년 1월부터 2017년 7월까지 교육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했으며, 2017년 7월부터 2024년 2월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연구원이자 학예사로 근무했다. 또한 직장 생활을 하며 계속 동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밟아, 논리경험주의의 시간과 공간 철학이 갖는 의의를 연구한 논문 〈상대론적 시·공간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적 해명〉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023년 2월). 박사학위 이후 2024년 3월부터 국립목포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과학기술철학 전공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분석과 물리적 지식의 인식론〉 등 11편의 연구논문을 집필하여 학술지에 게재하였고, 라이헨바흐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2014년, 지식을만드는지식), 《나우 : 시간의 물리학》(공역, 2019년, 바다출판사),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2022년, 김영사) 등 7권의 과학철학 서적을 번역했다. 현재 아내 및 세 명의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차례
서 문
제1장. 의미
제1절. 인식론의 세 가지 임무
제2절. 언어
제3절. 명제들의 세 가지 술어
제4절. 한 사례로서의 체스 언어, 의미와 진리 이론의 두 원리
제5절. 진리의 물리적 이론을 일상 언어의 관측 진술들로 확장하기
제6절. 의미의 진리 이론을 일상 언어의 관측 명제들로 확장하기
제7절. 간접 명제의 의미, 의미의 확률 이론의 두 원리
제8절. 의미의 검증 이론에 대한 논의
제2장. 감각 인상과 외부 세계
제9절. 관측 명제의 절대적 검증 가능성 문제
제10절. 감각 인상과 존재의 문제
제11절. 추상물의 존재
제12절. 세계의 실증주의적 구성
제13장. 환원과 투영
제14절. 관측 불가능한 대상들로의 추론 모형으로서의 정육면체 세계
제15절. 물리적 대상과 감각 인상 사이의 관계로서의 투영
제16절. 자기중심적 언어
제17절. 언어 문제로서의 실증주의와 실재론
제18절. 의미의 기능적 개념
제3장. 감각 인상들에 관한 탐구
제19절. 우리는 감각 인상들을 관측하는가?
제20절. 감각 인상 명제들의 가중치
제21절. 기초적 진술들의 추가적인 환원
제22절. 명제들의 유일한 술어로서의 가중치
제4장. 구체물 기초 위에서 세계를 투영적으로 구성하기
제23절. 단어 “존재”의 문법
제24절. 존재의 서로 다른 종류
제25절. 세계의 투영적 구성
제26절. 심리학
제27절. 이른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경험들의 비교 불가능성에 대하여
제28절. 자아란 무엇인가?
제29절. 인식론적 구성의 네 가지 기초
제30절. 세계 구성과 동등화된 가중치들의 체계
제31절. 직접적으로 관측된 대상으로부터 보고로의 전이
제5장. 확률과 귀납
제32절. 확률 개념의 두 형식
제33절. 차이 개념인가 동일성 개념인가?
제34절. 가중치의 개념
제35절. 확률 논리
제36절. 확률 논리를 이가 논리로 변환하는 두 방법
제37절. 논리에 대한 선험주의적 개념과 형식주의적 개념
제38절. 귀납의 문제
제39절. 귀납 원리의 정당화
제40절. 귀납에 대한 우리의 정당화에 대한 두 반론
제41절. 연쇄된 귀납
제42절. 두 종류의 단순성
제43절. 지식의 확률 구조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는 현미경과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원자들과 행성 체계의 모형을 구성하며, 생명체의 내부를 X광선을 통해 통과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얻은 모든 서로 다른 그림들을 하나의 우월한 전체로서 조직화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이러한 전체가 그 자체로는 직접적인 관점이라는 의미에서의 그림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좀 더 간접적인 의미에서 직관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지평선을 동반하면서 관점과 관점을 넘나들며 이 세계 속을 돌아다닌다. 주관적인 관점들의 지성적인 통합과 같은 활동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 관점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객관성의 끝없는 증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일관된 확장이다.
-322쪽
지식을 이가 명제의 체계로서 간주한 것은 전통적인 인식론의 심각한 실수였다. 모든 종류의 선험주의가 비롯된 것은 바로 이 개념으로부터였다. 이는 종합적 특성을 가진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회의주의가 비롯된 것도 이 개념 때문이었다. 그러한 절대적인 지식의 문제에 직면한 좀 더 비판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태도는 진리의 포기였다. (…)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도, 절대적 무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558~5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