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너 템플 법학원의 두 재사 토머스 노턴과 토머스 색빌은 크리스마스 축제 때 공연할 목적으로 ≪브리튼 열왕기≫에서 소재를 가져다 비극 <고보덕>을 완성했다. 형제간의 왕권 다툼, 백성들의 봉기, 유력 귀족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고보덕 왕가의 몰락 과정을 보여 주며 전제 군주의 대안으로 의회를 제시한 급진적인 작품이었다. 정치적·종교적 공세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왕좌를 차지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동안 정치 드라마의 무대 상연을 엄격히 금하던 때에 이런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이듬해 웨스트민스터 궁전 화이트홀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관하는 가운데 공연되는 영광을 누렸다.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영국민 누구나 좋아하는 역사적 소재를 취한 것이었다. 야사, 비사,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역사로 받아들이던 당시 영국민에게 ≪브리튼 열왕기≫ 내용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흥미로웠다. 특히 고보덕은 쿠네닥의 6대손으로, 유명한 리어 왕의 후손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처럼, 리어 왕에겐 세 딸이 있었다. 쿠네닥은 그중 차녀 리건의 자식이었으며, 리어 왕의 셋째 딸이자 뒤에 왕위 계승자가 되는 코델리어에겐 조카인 셈이었다. 쿠네닥은 이모 코델리어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이후 33년간 홀로 영국을 다스렸다. 고보덕은 이처럼 갈등과 피로 얼룩진 왕좌를 평화롭게 두 아들에게 넘겨주고자 선양과 분할 통치라는 두 가지 파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왕가의 몰락을 초래하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초연이 크리스마스 축제의 일환이었던 것 또한 작품의 성공에 한몫했다. 이너 템플, 즉 법학원의 자치 행사로 기획된 크리스마스 축제에는 소수의 유력 인사들만이 초대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이 작품이 제재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초연의 성공에 힘입어 <고보덕>은 이듬해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는다. 웨스트민스터 궁전 화이트홀에서의 이 공연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두 저자가 작품의 정식 출판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그 대본은 영영 묻힐 뻔했다. 한 출판업자가 이를 되살려 해적판으로 출간했고, 이후 정본을 주장하는 여러 편집본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고보덕>은 현대 독자에게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무운시 형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드라마이자 고대 그리스 비극, 로마극의 영향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영향이 두루 엿보이는 읽는 희곡, 즉 서재극으로 <고보덕>은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00자평
고보덕 왕은 선양을 통해 두 아들에게 평화롭게 권력을 넘겨주고자 한다. 그러나 왕의 의도와 달리 형제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야욕에 사로잡히고 형제의 갈등은 왕가 전체의 몰락을 초래할 끔찍한 비극의 씨앗이 된다. 토머스 노턴과 토머스 색빌은 ≪브리튼 열왕기≫에 등장하는 고보덕 왕가의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축제 때 상연할 드라마로 각색했다. 고대 영국 왕가의 비극적인 역사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지은이
토머스 노턴(Thomas Norton)은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1555년에 이너 템플 법학원에 입학했다. 영국 의회에서 서리(Surrey) 주의 가튼(Gatton) 지역 대표를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고, 대주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에 심취했는데, 특히 칼빈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1561년에 칼빈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Institution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을 고문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여 ‘고문 대장’(Rackmaster General)이란 악명을 얻기도 했다. 노턴이 가톨릭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딸이자, 가톨릭 신봉자인 메리가 통치하던 1556년에 자신의 장인인 토머스 크랜머가 화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노턴은 법 관련 업무로 인해 1579년에는 로마에 체류한 바 있고, 이후에도 3∼4년은 채널 제도 관련으로 출국이 잦았다. 1570년에 런던시 최초로 왕실 수입 징수관에 해당하는 리멤브런서(remembrancer)라는 직을 맡았는데, 1584년 죽을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말년에는 종교적인 문제로 영국 성공회 주교들에게 반기를 드는 바람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런던탑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때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1584년 3월에 사망했다.
토머스 색빌(Thomas Sackville)은 리처드 색빌(Richard Sackville) 경의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불린과 친척 관계였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이너 템플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558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같은 해 하원의원이 되었다. 1563년경 이탈리아로 긴 여행길에 올랐으며, 1566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귀국했다. 이듬해 버커스트 남작 작위(Baron of Buckhurst)를 받았으며, 그 뒤에도 정부 관직을 떠나지 않아 1585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으며, 1587년엔 프랑스에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고, 옥스퍼드대학교 총장(Chancellor, 1591)과 재상(Lord High Treasurer, 1599) 등을 지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후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고서 그를 다시 재상으로 임명했다. 1567년 기사 작위와 남작 작위를, 1604년에 백작 작위(Earl of Dorset)를 받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608년 뇌졸중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색빌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와 희곡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몫을 한 시집 ≪군주를 위한 거울(A Mirror for Magistrates)≫(1563)의 일부를 저술하면서 문필가로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부 학자들은 <고보덕>이 색빌의 단독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옮긴이
허명수는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 대위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영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한동대학교에서 1995년 개교 때부터 영문학과 번역학을 강의하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 <Blood-Oriented Dramaturgy in Shakespeare’s Titus Andronicus, Othello, and Cymbeline>(1993)을 비롯해 영문학과 번역학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를 발간했다. 한동대학교에서 교수협의회 초대회장, 대학신문사 초대 주간 교수, 학부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등을 지냈으며 2019년 9월 은퇴하여 현재 명예교수로 한동대 통역번역대학원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1999년부터 한국번역학회 창립 멤버로 20년간 번역학회 발전과 함께하며 편집위원장, 총무이사, 수석부회장, 회장을 지냈고 현재 고문으로 섬기고 있다. 셰익스피어 학회와 고전르네상스영문학회에 멤버로 참여한 바 있으며 여러 학회의 발표, 논문 심사, 공동 연구 및 번역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2006년 미국 앨라배마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지금까지 포항침례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논문 및 저서로는 박사학위 논문 외에 <세계화와 번역>(2003), <오독과 오역의 미학>(2006), ≪영어강의 이렇게 준비하라≫(공저, 2006), <고전문학 번역에서의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고찰 :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번역을 중심으로> (2010), <성경번역의 용인성 : 셰익스피어 시대의 제네바성경을 중심으로>(2014년) 등이 있다. 이외에도 헤리 R. 루이스 저, ≪허버드가 잃어버린 교육 : 대학 교육의 미래는?≫(2008)을 공동으로 번역했고,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2017)를 번역했다.
차례
비극의 개요
인쇄인이 독자에게 드리는 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참고 자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고보덕 : 대신들이여! 경들은 진지한 충언과 충성스런 도움으로
오랫동안 과인의 명예와 나라를 지켜 주었고
과인을 소싯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어,
이토록 위대한 왕국과 명성을 얻게 했소.
허나 지금 나의 통치에 길잡이가 된 경들의 충성심과 지혜가
과인에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소.
죽음과 더불어 과인의 삶과 통치가 끝나도
이 나라가 공백 없이 확고한 군주를 중심으로 한
경들의 확실한 권리 덕분에 부와 평화를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오.
더욱이 때가 되면 왕자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적절한 시기에 군주인 내 왕좌를 물려받을 터,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엔 왕자들이 아직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으니
그들이 장차 잘 통치할 수 있는 틀을 갖출 수 있도록
고귀한 기예를 배우고 연마하게 타일러서
앞선 선왕들이 선정을 베풀어 그들에게
위대한 명성을 물려준 것처럼 왕자들 역시
후손들에게 명예롭게 이를 물려줄 수 있길 바라오.
-21쪽
유불러스 : 오, 여기 브루투스 왕의 혈통은 끝났도다.
이 고귀한 왕국에 슬픈 파멸과
완전한 붕괴가 도래했도다.
국왕과 왕자들도 살해되고
이 왕좌에는 다스릴 자가 없으니
왕홀을 원하는 계승자 역시 알 수 없어,
밖으로는, 가련한 나라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풍요로운 나라를 손에 넣으려고 갑작스레 병력을
동원하는 외국 군주의 무력과
안으로는, 나라를 통치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망으로 오만하고 탐욕스런 마음들 가운데
영국 영토는 먹잇감으로 노출되었으니,
계속 정복당해 이젠 나라가 전리품으로 전락했는데
얼마나 많은 야망을 가진 자들이 이 왕국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151-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