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목 ≪과학의 가치≫는 이 책이 다루는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내용 여러 군데서 저자는 “과학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푸앵카레는 ‘과학적 연구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톨스토이나 오귀스트 콩트의 주장을 반박하며 “과학은 실용적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실용적”이며 과학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은 예술처럼 미학적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은 과학 활동 자체에서 가치를 찾는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의 목표는 “과학을 위한 과학”이어야 하며, 이런 목적에서만 다른 실용적 목적도 부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그 자체로 인간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푸앵카레는 과학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뿐만 아니라 ≪과학과 가설≫, ≪과학과 방법≫에서도 푸앵카레는 주제를 산술(수학)-기하-물리 순으로 배치했는데, 이는 먼저 나온 것이 뒤에 나온 것의 기본 전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과학의 분야들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들에도 그 중요성에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런 것에 따라 선별적으로 연구를 실시한다고 보았다.
그는 ≪과학과 가설≫ 이래 모든 저서를 통틀어 일관되게 규약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순수 수리 직관을 지배하는 산술적 진리(예를 들어 1+1=2)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산술적인 객관적 진리의 전제조건 아래 있는 기하학은, 우리가 설정한 공리의 변화에 따라 여러 정리들의 기술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그 예로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곧음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을 예로 들었다. 또한 기하학이라는 전제조건 아래 있는 물리학도 원리라고 불리는 규약의 지배를 받으며, 그 규약이 정해지는 기준은 편리성이라는 단순한 이유밖에 없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실험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일부 수학자들이나 이론물리학자들은 실험의 역할을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푸앵카레는 실험을 배제하고 이론적으로만 자연 현상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망상”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수리적이며 이론적인 물리 연구는 자연 현상에 대한 근사에 불과하고, 이것들로부터 유도된 법칙이나 원리는 그저 실험 결과의 일반화로 보았다. 그러므로 수학이 물리학에서 작용하는 역할은, 현상을 표현하는 언어일 뿐이라고 보았다.
200자평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명성을 얻은 앙리 푸앵카레의 대중서다. 수학적 전개에 관한 태도,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로 시작해 시간과 공간의 정의, 과학의 상대성과 절대성, 과학의 목적과 같은 좀 더 철학적인 주제로 논의를 이어 간다.
국내 처음으로 프랑스어본을 완역해 출간했다.
지은이
쥘 앙리 푸앵카레는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과학철학자다. 수학에서는 위상수학과 대수기하학의 아버지가 되며, 물리적 업적을 포함해 고려하면 데카르트, 파스칼, 뉴턴, 라이프니츠, 오일러, 가우스 등과 같이 수학과 물리 두 방면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최후의 만능가”로 간주한다.
푸앵카레를 수학자로서 출세시킨 것은 캉대학에서 강사로 일할 당시, 특정한 대수적 변환 그룹 아래에서 불변으로 존재하는 복소변수 함수의 개념을 발견한 것이었다. 또한 호모토피(homotopy)이론에도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클라인과 함께 대수기하학의 시조라고 평가받는다.
또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이에 관해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고, 로바쳅스키 공리를 이용해 자신이 발견한 자기동형 함수 이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이듯이 최초로 차원수에 관해 직관적이며 귀납적인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1895년에는 전년에 발표된 논문을 묶은 저서 ≪위치해석≫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현대 위상수학의 시발점이 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수십 년간 위상수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도 몇 가지 해석적 복소함수를 고안해 복소해석의 발달에도 큰 공헌을 했으며,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확률론에 손대기도 했다.
푸앵카레의 물리학 업적은 수학 업적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원래 공학도였으며, 순수수학으로 대가가 된 후에도 물리나 공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소르본대학과 EP에서 강의할 때도 역학, 천체역학, 전자기학, 광학, 열역학과 같이 물리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을 정도로 물리에 정통했다.
푸앵카레는 특히 천체역학에 관해 여러 논문을 남겼는데, 주로 천체 운동의 안정성과 자기 중력에 뭉쳐져 회전하는 유체 덩어리의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명성을 날린 천체역학 외에도 3차원 연속체의 진동 문제나 열전도 문제, 퍼텐셜 이론, 그리고 전자기 현상에 관해서도 많은 이론적 연구를 하고 논문을 남겼다.
이 밖에도 푸앵카레는 초기 상대론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로런츠 에테르 이론과 맥스웰 방정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상대론에 관한 논문도 여러 편 냈다. 본문에도 잠깐 보이지만 이런 논문들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과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이렇기 때문에 불운하게도 푸앵카레의 상대론 연구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과 일반상대론이 나오면서 가려지고 말았다.
옮긴이
이정훈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UC San Diego)에서 수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존스홉킨스대학 박사 과정에서 공부했다. 역서로는 아이리스 장(Iris Chang)의 ≪Thread of the Silkworm≫을 번역한 ≪중국 로켓의 아버지 첸쉐썬≫(2013, 역사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등이 있다.
차례
권두 에세이
서문
제1부 수리과학
제1장 수학 내의 직관과 논리
제2장 시간의 측정
제3장 공간의 관념
제4장 공간과 3차원
제2부 물리과학
제5장 해석학과 물리학
제6장 천문학
제7장 수리물리학의 역사
제8장 수리물리학의 현재적 위기
제9장 수리물리학의 미래
제3부 과학의 객관적 가치
제10장 과학은 인위적인가?
제11장 과학과 실재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틀림없이 독자는 수학에 관련된 여러 질문을 수없이 받아 보았을 것이다. ‘수학의 목적이 무엇인가?’, ‘전적으로 심리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런 구성체들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아니면 우리의 즉흥성이 만들어 낸 것인가?’
-147쪽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우리가 어렴풋이 예상하고만 있는−새로운 역학을 건설해야만 한다. 이런 역학에서는 속도가 증가할수록 관성이 증가하며, 광속은 아마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될 것이다. 보통의 역학은 더욱 간단하지만, 그저 기초근사법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속도가 매우 크지만 않으면 맞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전의 역학은 새로운 역학 아래에서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원리들을 믿어 왔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전에 있던 공식들에 넣기에 매우 큰 속도는 항상 예외적이기 때문에, 실제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냥 이런 원리들을 아직도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에게 한 자리를 남겨 주어야 한다. 그들을 완전히 배제하려 하는 것은 유용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마치면서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에게 아직 새로운 역학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영광스러웠고 건재했던 투쟁으로부터 원리들이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질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