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은 그림이자 문자이며 행위예술이다. 만약 두 장르를 미술로만 바라보면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이 탄생한 도시 공간이 지니는 의미를 알기 어렵다. 문자적 측면 즉 언어와 상징으로서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이 가진 의미까지 파악할 때 그 의의와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을 창조한 청소년의 현실도 이해할 수 있다. 현대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은 사회와 갈등하던 청소년들이 도시의 벽과 거리에 남긴 그림문자이기 때문이다. 행위예술로서 접근하면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이 대중문화와 사회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중이 발견하고 자본이 받아들인 이 거리의 예술은 오늘도 일상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있다. 이 책은 그라피티와 거리예술로 현대의 대중, 도시, 자본, 예술을 설명했다.
지은이
김태형
계명대학교 미국학 전공 교수다.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뉴욕대학교와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어바인캠퍼스에서 각각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Performing Victimhood in Asian American Drama”(2009)에서 아시아계를 포함한 미국 내 소수 민족이 피해자 의식을 체현하는 역사를 드라마를 통해 분석했다. 저서로는 『미국드라마: 공연을 위한 희곡 읽기』(2018)가 있다. 『총과 펜, 그리고 꿈들』(2014)을 번역했고 『프론티어: 미국 서부의 신화』(2018)를 편역했다. 논문으로는 “거리예술가 뱅크시 분석: 뱅크시의 뉴욕 퍼포먼스(2013)를 중심으로”(2018), “응구기 와 시옹오의 『나를 위해 노래해요, 엄마』가 수행한 민중의 탈식민화”(2017), “9/11 이후 미국정치극 연구: 다큐멘터리극이 증언한 생명정치”(2014), “다큐멘터리극의 상상력: 하비 밀크 사건을 향한 청각기억의 확장”(2011) 등이 있다.
차례
01 그라피티의 기원
02 뉴욕과 현대 그라피티
03 그라피티 기법, 도구, 관행
04 그라피티 미학
05 그라피티와 거리예술
06 그라피티 라이터와 거리예술가
07 거리의 예술과 도시
08 거리의 예술과 자본
09 그라피티, 거리예술, 뱅크시
10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의 운명
책속으로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르는, 킬로이가 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그라피티는 다른 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없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해 지워질 가능성도 크다. 이렇게 생산된 결과물들은 그라피티에 잠시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가 보고 궁금해 하고 따라 하고 지우기도 하는 행동들이 지속적으로 그라피티가 가지는 “순간의 의미”와 그 “뒤를 잇는 무의미”를 생산한다. 누가 쓰고 그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쓰고 그릴지 역시 모르지만 누군가는 쓰고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라피티들에 반응했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행위의 가능성이 그라피티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동력이다.
“거리의 예술” 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개인적 차원이든 동료와 교감과 소통을 시도하는 공동체 차원이든 대중에게 보여 주고 체제를 비판하는 사회적 차원이든 그라피티 라이터는 공간을 점유하는 와중에 파괴를 위해 창조하는 모순을 경험한다. 라이터는 도시 안 남의 땅을 가로지르면서 잠시 그 공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점유한다. 그라피티를 고안하고 창작하고 스타일을 발전시키면서 결과적으로 타인의 소유물을 파손한다. 물질적·관념적 공간을 생산하고 파괴하고 재생산하는 그라피티는 창조적 파괴 행위다.
“그라피티 미학” 중에서
유명한 미술품 경매 회사 ‘소더비(Sotheby’s)’에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품으로 꼽힌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가 경매된다(The Guardian, 2018. 10. 6). 하트 모양의 풍선이 날아가는 것을 보는 소녀의 이미지는 경매된 뱅크시의 작품 중 최고가에 가까운 15억 원에 낙찰된다. 그런데 낙찰이 결정된 직후 소녀 이미지가 그려진 캔버스가 자동으로 내려가면서 그림틀에 미리 설치된 파쇄기에 의해 반쯤 잘린다. 뱅크시는 그림이 경매에 올라갈 경우를 대비해 파쇄기를 액자에 몰래 설치하는 과정과 이 그림이 경매장에서 파쇄되는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려 스스로 작품을 파괴했음을 알린다. 이런 퍼포먼스가 파괴된 그림의 가치를 올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겠지만 뱅크시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경매장에서, 가장 사랑받으며 높은 시장 가치를 지닌 작품을 스스로 없앰으로써 시장의 논리와 대중의 취향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파괴가 논쟁을 낳는, 어쩌면 거리의 예술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퍼포먼스다.
“그라피티, 거리예술, 뱅크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