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선승, 금강산을 기록하다
이 글은 구하 스님이 1932년 4월 7일에 통도사를 출발해 8월 28일 다시 통도사로 돌아올 때까지 약 5개월간의 행적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록(旅行錄) 혹은 관상록(觀賞錄)이다. 구하는 물금역을 출발해 서울→철원→금화→금성→단발령→말휘리→내금강역으로 연결된 내륙 철도를 이용했다. 구하가 금강산에 도착한 뒤 장안사를 거점으로 기록이 시작되는데, 본문 격인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金剛山路程及觀賞)>는 크게 노정과 관상시로 나뉘어 있다. 노정에는 통도사에서 출발해 금강산 장안사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 금강산에서의 관상, 돌아오는 귀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찰과 관련한 이야기, 구조와 정취, 소장 유물과 부속 암자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조선 불교 시승의 맥을 잇다
≪금강산관상록≫은 크게 기행록인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 그리고 관상시인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짓다>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 안에도 중간중간 구하가 금강산에서 본 선인들의 관상시와, 이에 대해 화답한 구하의 시들이 들어 있다. 구하의 시들은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금강산 곳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찬탄을 기본으로 했으며, 승가의 일상적 모습, 사찰의 고요한 정취 등을 담아내었다. 풍부한 시학과 한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난 이 시들은 근대 승려의 시문 창작과 활용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문학이 쇠퇴해 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승가의 자료와 시문들은 근대 한문학의 자취를 이어 줄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200자평
승려의 눈으로 본 금강산
근대 통도사의 선승이자 시승이었던 구하 스님의 금강산 여행기와 관상시들을 소개한다. 경승 유람으로 일관된 유학자들의 기록과는 달리, 금강산을 수행의 근원이자 치유의 공간으로서 바라보는 승려의 시각은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구하 스님은 금강산 내의 각 사찰과 소장 유물, 부속 암자 등을 상세히 밝히고 순례자의 눈으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묘사한다. 그의 관상시에서는 조선 불교 시승의 맥을 이은 구하의 풍부한 시학과 한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난다.
지은이
구하(九河, 1872∼1965) 스님은 근대 통도사의 개혁을 이끈 선승(禪僧)이자 시승(詩僧)이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 시호(詩號)는 축산(鷲山)이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했고, 1886년 경월도일(慶月道一)을 은사로 득도했다. 1896년 표충사에서 만하승림(萬下勝林)에게 대소승계를 수지했다. 이후 1899년 통도사에서 수선 안거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내외 경전을 두루 섭렵하게 된다. 1899년(28세)에 통도사 황하각에서 성해남거(聖海南巨) 선사의 전법 제자가 되어 구하(九河)라는 법호를 받았고,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1932년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4년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를 설립해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 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0년부터 15년간 통도사 주지를 맡아 근대 통도사의 개혁을 이끌게 된다. 구하의 개혁은 ‘안으로부터의 개혁’이 우선이었고, 환성의 법손임을 매개로 대중을 아울렀으며 교육을 기반으로 포교와 역경 사업을 함께 추진했다. 불교를 통해 세상과 공생하고자 했으며, 무엇보다도 일제 치하에서 ‘독립’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위해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불교계 독립 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수많은 글씨와 시문들을 남기기도 했다. 1963년 10월3일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옮긴이
최두헌(崔斗憲)은 1976년 경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한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한문학과에서 <경봉 정석의 한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통도사 성보 박물관 학예 연구실장으로 있으면서 통도사 승려들의 시문에 대한 연구들을 진행해 오고 있다. 2020년에는 박물관 발전 공로로 문화 체육 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서예·전각가로서도 활동하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 작가, 경기도·경인·경상북도 서예 대전과 전국 휘호 대회(국제 서법 예술 연합) 초대 작가이자, 한국 서예가 협회·한국 전각가 협회의 회원이다. 개인전을 2회 열었으며, 현재 경주에서 전각 연구실 <석가(石家)>를 열어 불교 문학의 시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차례
관상록에 적다(觀賞錄記) 3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金剛山路程及觀賞)
1932년 4월 29일
5월 2일
5월 3일
5월 5일
5월 5일
5월 6일
5월 9일
5월 7일
5월 8일
5월 9일
5월 10일
5월 20일
5월 22일
5월 23일
5월 24일
5월 25일
5월 26일
5월 27일
6월 20일
7월 16일
8월 5일
8월 6일
8월 8일
8월 10일
8월 12일
8월 13일
8월 14일
8월 15일
8월 16일
8월 23일
8월 24일
8월 25일
8월 26일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짓다
단발령
내금강역에 처음 들어서며
운주문
만천교
장안사
여름에 금강산 장안사에 있으면서 마음대로 읊다
명경대
영원암
수렴동
망군대
백탑동
장경암
보문암
안양암
옥천암
표훈사
능파루
정양사
헐성루
만폭동
명연담
돈도암
신림암
청련암
보덕굴
마하연
백운대
금강수
묘길상
만회암
불지암
내원통
수미탑
선암
유점사
외무령
오탁천
중내원
미륵봉
송라암
은선대
십이폭
칠보대
금사정
내무령
비로봉
금강문
신계사
미륵암
보광암
문수암
보운암
상운암
법기암
동석동
양봉래 출생지
집선봉
문필봉
삼관음봉
발연사 터
온정리
수정봉
발우봉
한하계
천불동
구만물상
만상정
신만물상
오만물상
천선대
선담
앙지대
옥류동
연주담
무비폭
수렴폭
구룡연
팔담
옥녀봉
금강산에 붙이다
해금강
현종암
영랑호
구선봉
적벽강
고성군
삼일포
외금강역 출발 장소에서 금강산을 되돌아보다
총석정
삼방약수
발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5월 8일
초8일 아침 공양 후 만회암(萬灰庵)에 오르니 주지 보원(晋原) 선사는 없고 전각은 비어 있었다. 앉아서 살펴보니 그윽하기 그지없고 맑고 넓어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오른쪽에는 바다 위에 용왕봉(龍王峰)이 있고, 왼쪽에는 남순동자봉이 있다. 동쪽에는 고개가 있는데 매우 험난해 모자를 벗고 물건을 두고 맨 몸으로 몸을 숙이고 나아가 큰 바위 기슭을 벗어나 마침내 철끈을 잡고 내려오니 48층 나무 계단이 또 있더라. 그것을 타고 오르니 마치 말의 척추처럼 곧게 뻗어 있어 앉아서 보니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황홀하더라. 위아래 중향성(衆香城)은 바로 대(坮)의 북쪽에 세워져 있었다. 계곡으로 나와 아래로 수십 보를 가니 사람들이 돌을 쌓아 놓은 곳에 우물이 하나 있으니 금강수(金剛水)라 말하더라. 표주박으로 가득 마시고 다시 만회암으로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수미암(須彌庵)으로 향했다. 험한 골짜기를 뚫고 들어가니 썩은 나무들이 이어 종종 길을 막았다. 절벽에 오르기도 하고 홀로 나무를 계단 삼으며 또 한 고개를 올라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니 계곡 길이 더 희미해진다. 먼저 간 사람들을 따라 좌우로 기운 작은 고개를 오르니 나무 판잣집 한 동이 있었다. 이곳이 수미암(須彌庵)이다. 경남 내원선원(內院禪院)에 있던 청남(淸嵐) 선객이 있어 환영해 주니, 가는 곳마다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가리키는 경치를 따라 보니 뜰 앞 천진구암(天眞龜岩), 골짜기 아래 용암(龍巖), 칠성탑(七星塔)과 좌우 돌벽의 층암(層巖)이 하나의 큰 볼거리로, 내금강(內金剛)에서 최고의 암자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 조사가 창건했고, 야운(野雲) 조사도 함께 도를 닦았다. 점심을 지어 먹고 정처 없이 지팡이 하나로 영랑봉(永郞峰)에 오를 때는 서로 손을 잡고 발을 바위틈에 붙여 먼저 오른 사람이 위로 끌어 주었다. 높은 층암 위에 올라 좌우를 살펴보니 건너편에 대륙산(大陸山)이 특별하게 빼어나고, 더욱 아름다운 것은 수미봉(須彌峰)의 뻗은 산줄기였다. 높고 깊은 계곡의 골짜기는 끊어지고 북쪽으로 돌을 쌓아 층을 이루니 층이 70층이요, 색이 순백한 것이 이것을 일러 수미탑(須彌塔)이라 하더라. 실로 하늘의 진면목이라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처럼 황홀하더라. 거닐면서 참배하고 앉아서 경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원효 조사가 영랑 선인(永郎仙人)을 이 바위에서 서로 만나 도(道)를 닦았다하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한 노승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한 손으로는 귀를 덮고 한 손으로는 코를 덮고 참선하는 듯한 모양인데 가섭암(迦葉巖)이다. 3∼4시간 좌선하다가 암자(수미암)로 돌아와서 부처님 전에 예불을 드리고 하루를 묵었다.
선암
발 내디뎌 뿌리 잡고 푸른 하늘로 오르니
문득 위태로이 신선이 노니는 듯하네
박빈 거사가 진리의 눈을 여니
두 부처가 능히 돌로 된 배로 초대하는구나
船庵
擲足扶根上碧霄 却疑落落羽仙遊
朴彬居士開眞眼 二佛能爲石船招
송라암
물 위의 달빛 맑디맑은 곳에 절집 하나 그윽한데
물결을 말하고 바다를 말하다 내가 먼저 알았네
구름 쫓고 달 가리키니 도(道) 아닌 것이 없고
물을 배우고 산을 보는 것 모두가 스승이라네
松蘿庵
水月澄澄一寺幽 談波說海我先知
隨雲指月無非道 學水觀山盡是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