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헤이안 시대의 문인 기노 쓰라유키의 산문인 ≪고금와카집 가나 서문≫과 ≪도사 일기≫를 엮은 것이다. 전자는 쓰라유키의 시론이며 후자는 여행 중의 일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역자인 강미나는 일본의 고대문학을 전공한 학자로, 쓰라유키의 산문문학을 살펴보기 위해서 두 작품을 한 데 엮었다. 특히 옛 일본어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옮기는 데 힘을 쏟았다.
기노 쓰라유키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고쿠후(國風) 문화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고쿠후 문화는 고대국가의 성립 단계에서 중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일본이 자신들 나름의 문화를 자각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를 말한다.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와카는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했고, 가나가 한자와 더불어 문학작품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었다.
쓰라유키의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이다.
우선, ≪고금와카집≫은 천황이 당대에 전해지던 와카를 모아 편찬할 것으로 명하여 만들어진 노래책인데, 쓰라유키는 편찬자로서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해 가나 서문을 썼다. 가나 서문은 일종의 평론으로, 와카에 대한 최초의 시론으로 알려진 것이다. 중국의 시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견해를 덧붙여 일본 와카의 기원과 역사, 유명했던 시인들의 작품을 평하고 있다. 한자로 쓰인, 또 다른 서문인 마나 서문과 내용은 비슷하나 보다 심오한 이해를 보여 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한자로 쓰인 작품보다 가나로 쓰인 작품이 더 훌륭하니, 문학 언어로서 가나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도사 일기≫는 쓰라유키가 도사 지방관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는 길에 쓴 기행문으로, 허구적인 장치를 사용해서 높은 문학성으로 보여 준다. 작자의 경험과 느낌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보통의 기행문과는 달리 가공의 여성 화자를 내세워 뱃길의 여정과 배 안에서의 풍경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쓰라유키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찰해서 묘사하는 등, 다양한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쓰라유키의 훌륭한 작품들 덕에 여성들의 언어였던 가나는 문학 언어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일본의 독자적인 문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책은 쓰라유키의 산문 세계에 대한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200자평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 기노 쓰라유키의 산문 작품을 엮었다. 쓰라유키는 ≪고금와카집≫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와카에 대한 최초의 평론으로 일본 문학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도사 일기≫라는 기행문을 써서 수필 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가나’로 된 산문인데, 쓰라유키 덕에 당대의 문학 언어로서 가나의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이 책은 시인으로 잘 알려진 쓰라유키의 산문 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지은이
기노 쓰라유키는 생몰년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개 서기 870년경에 태어나 945년경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일본의 가가(加賀), 미노(美濃), 도사(土佐) 등의 지방 수령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특히 도사를 다녀와서 도사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회를 일기로 적은 ≪도사 일기(土佐日記)≫라는 작품은 일본 일기 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젊은 시절부터 와카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개인 와카집인 ≪쓰라유키집(貫之集)≫이 남아 있다. ≪고금와카집≫에는 102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고금와카집≫에 실려 있는 전체 작품수가 1100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옮긴이
강미나는 서울 출생으로 일본 고쿠가쿠인대학교(國學院大學校)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간 《인터넷시대의 종교》(도서출판 역락) 외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풍토기》, 《일본의 종교》, 《고사기》, 《양생훈》, 《만엽집》 등을 번역했다.
차례
고금와카집 가나 서문 (古今和歌集假名序)
1. 와카의 본질과 효용
2. 와카의 기원
3. 와카의 모습
4. 와카의 역사
5. 고금와카집의 편집 과정
도사 일기 (土佐日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고대 대대로 제왕은 꽃이 핀 봄 아침, 달이 아름다운 가을밤이 되면, 언제나 사람들을 모아서 그때의 사물에 무언가를 연관시켜 노래를 읊어서는 헌상하게 했다. 어느 때는 꽃에 심사를 의탁해 생각을 읊는다며 안내자가 없는 장소를 헤매고, 어느 때는 달을 음미하기 위해 인도자도 없는 잘 모르는 토지를 갈팡질팡 걷는 사람들의 심중을 보고, 그들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정도를 구별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조약돌에 비유해서 임금의 장수를 축하하거나, 쓰쿠바 산(筑波山) 나무 그늘에 서원해서 임금의 은총을 기원하며, 신분을 넘는 행복이나 마음에 넘치는 환희를 사람에게 알리고자 했다. 후지 산(富士山) 연기를 들어 사람을 그리워하고, 푸른 귀뚜라미 소리에 친구를 그리워했다. 다카사고(高砂)나 스미요시(住吉)의 소나무까지 오랜 친구로서 비유하고, 남산(男山)처럼 강했던 장년 시대를 생각하거나, 여랑화의 아름다운 한창때를 같이 한탄할 때에도 노래를 읊어서 위로했다. 또 봄날 아침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날 저녁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혹은 해가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쳐 눈에 띄는 백발과 흰 수염을 슬퍼하거나 풀 이슬이나 물거품을 보고 내 몸의 덧없음을 보고 놀라워했다.
2.
1월 29일, 배를 띄워 저어 간다. 햇볕은 화창하게 내리쬐고 배는 점점 노 저어 간다. 손톱이 많이 자란 것을 보고 날을 헤아려 보니 오늘이 자일(子日)이라 자르지 않았다. 정월이라서 서울의 자일 놀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작은 소나무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말해 보지만, 아무튼 바다 한가운데라서 어쩔 도리가 없다. 어떤 여인이 노래를 써서 내밀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오늘이 정말 자일일까. 만일 내가 어부라면 이날에 맞게 바닷가 소나무라도 좋으니 뽑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