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교신의 수필을 논하기 위해서는 ≪성서조선≫을 빼놓을 수 없다. ≪성서조선≫이 곧 김교신이요, 김교신이 곧 ≪성서조선≫이기 때문이다. ≪성서조선≫은 1927년에 창간되어 1942년 폐간될 때까지 15년에 걸쳐 150호가 발행되었다. 독자는 300여 명 수준이었지만, 신앙적 파급력이 적지 않았다. 필진은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과 같은 일본 유학파 신앙인들이었다. 독자들은 손양원 목사, 장기려 박사 등의 유명인들부터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까지 다양했다. 많은 잡지들이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성서조선≫은 오랫동안 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김교신의 헌신적인 노력과 굳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의 복음화를 꾀했고, 조선적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선납금을 받고 잡지를 보냈지만, 가난하고 병든 독자들에게는 무료로, 가장 먼저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기성 교회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비판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에도 의연하게 잡지 출판을 멈추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힘을 다해 잡지를 만들었다. 그가 이렇게 사명감을 갖고 ≪성서조선≫을 출판한 것은 성경적인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분파주의와 평양의 부흥 집회로 시작된 감정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는 신비주의 신앙 대신에 성경에서 제시된 십자가 길의 의미를 밝혀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전파했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성경적인 기독교를 제창하는 데 집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열매 맺기를 권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바른 신앙은 항상 올바른 신앙생활로 이어지는 데 반해서 잘못된 신앙은 언제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않고 자기중심적이고, 교파나 자기 교회 중심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김교신의 신앙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선적인 기독교를 넘어서서 성경적 기독교, 진리에 기초한 기독교를 추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자평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 김교신. 그는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성경 위에서 독립 국가를 만들어 가려 했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종교가 만연한 오늘날, 그의 수필은 올바른 신앙과 올바른 삶을 향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지은이
김교신은 1901년 함남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와 어머니 양신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은 1903년 21세로 요절해 모친의 슬하에서 자랐다. 18세에 함흥농업학교를 마치고, 19세에 도일해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당시 일본의 저명한 영문학자 사이토 히사부로 밑에서 영어를 수학했다. 22세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중도에 박물 지리과로 전과해 27세에 졸업하고 귀국 후 함흥 영생여고와 서울 양정, 제일(경기), 개성, 송도 등에서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5년을 청년 교육에 종사했다. 그중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10년간이 가장 길었고, 1940년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재직 중에 불온 인물이라는 낙인으로 6개월 만에 추방되기도 했다.
1920년 4월에 길거리 전도를 받아 홀리니스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내의 심한 부패와 알력에 회의를 품고 같은 해 11월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서 강연에 참석했다. 1927년에는 김교신을 포함한 함석헌, 송두용, 양인성, 류석동, 정상훈 등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 동지 6명이 모여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1930년부터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의 주필이 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원고 작성, 잡지 편집, 배송, 총독부 검열 등 잡지의 제작과 발간, 우편 배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했다. 그래서 김교신과 ≪성서조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수필이나 산문이 모두 ≪성서조선≫에 실려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942년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발단이 되어 김교신을 비롯한 구독자들이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로 인해 김교신은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1943년 불기소 처분으로 출옥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김교신은 한동안 신앙을 전수한 형제들을 방문하며 신앙생활을 독려했다. 1944년 함흥 질소 비료 공장에 입사해 3000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와 교육, 의료, 주택 등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45년 공장 노동자의 병을 간호하던 중에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갑자기 사망했다.
엮은이
김학균은 1970년에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초빙 교수와 고려대 BK21 한국어문학교육연구단 연구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서울시립대 교육연구 객원교수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의 글쓰기를 돕고 있다.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화자의 성격 연구>, <염상섭 소설의 추리소설적 성격 연구>, <≪사랑과 죄≫에 나타난 연애의 성립 과정> 등 염상섭의 소설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염상섭 소설의 추리소설적 성격 연구> 외에 한국 근대 소설에 나타난 질병의 양상을 다각도로 연구한 논문들도 여럿 있다. ≪염상섭 소설 다시 읽기≫를 냈다.
차례
漢陽의 들아!
入信의 動機
入信의 動機(續)
弟子 된 者의 滿足
偉人의 意義
≪聖書朝鮮≫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
孔子 只今 出現한다면
地圖와 信仰
友人에게 告함
一九三三年
絶大한 感謝
배울 수 있는 사람
우리는 한 平信徒다
無用한 興奮 1
無用한 興奮 2
無用한 興奮 3
最大한 偶像
슳븐 對照
사실이라는 말
나의 信仰의 本色
學校 敎育에 對한 不滿
시작이 절반
人道와 神道
포풀라나무 禮讃
포풀라나무 禮讃 [基二]
勝戰歌의 生涯
植木의 心理
문둥아!
질그릇에 담은 보화
沈 奉事의 所願
病床의 友人에게
入學 試驗 光景
基督敎 信仰의 基盤 [復活]
나의 基督敎
信仰의 主觀 客觀
成功을 斷念함
朝鮮의 希望
想峴
聖書朝鮮을 받으라
責務를 分擔하리라
成造 小感
헬렌 켈러
剽竊 問題
敬慕하는 聖經 人物
最後의 사랑을
東小門 안의 感激
聖徒의 資格
聖徒의 릴레이
敎師 心境의 變化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냐
提訴와 敗訴
經濟生活과 信仰
天下에 新奇한 것(聖誕節을 待하면서)
우리를 利用하라
如是我信
安息日의 百姓
階段的 生涯
告白의 効果
眞珠를 探求하라
落膽하지 않는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余輩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밋는 單只 一個 平信徒다. 大旨가 무엇인지 小旨가 무엇인지 主日 工課册은 엇더케 된 것인지 生命錄이란 무웟인지도 아지 못하는 不足한 平信徒다. 敎會 規例도 不辨하며 朝鮮 內의 各 敎派 分封도 不知한다. 勿論 牧會法을 배왓을 이가 업고 說敎學을 읽엇을 수가 업다. 다만 내가 그리스도를 밋고 나의 家率과 少數의 兄弟가 來叅함이 잇을 에 ‘當然하고 한 道理를 그것지도 몰으는 者의게 나의 아는 대로’ 傳授한다. 그 자리에 叅席하기를 願하면서도 境遇가 不許하는 少數의 兄弟가 隔地에 잇다. 그 少數者의게 우리의 들은 대로 말한 대로를 傳하기 爲하야 ≪聖書朝鮮≫은 發刊된다.
<≪聖書朝鮮≫은 무엇인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