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남천은 소설 창작과 평론 활동을 동시에 펼쳐 나간 작가였다. 근대문학으로서의 장르별 발전과 그에 따른 창작에 대한 전문적 인식이 채 분화되지 못했다거나, 이른바 문사의 전통이 남아 있던 당대의 분위기와 비교했을 때 그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김남천의 창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것은 김남천이 자신의 비평 활동을 아주 구체적인 창작 방법론으로서 인식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당대의 비평이 상당한 정합성을 갖는 경우에도 실제 작품을 만나서는 대부분 인상적인 의견 제시에 머물고 만다거나 당위성을 앞세워 지도적인 위치에서의 평을 하고 있을 때, 김남천은 자신의 이론을 직접 창작의 영역과 연결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것에도 일정 부분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그가 사유와 실천을 같은 위치에 두고 진지하게 수행해 나간 예외적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그 구체적인 창작 방법론으로 ‘모랄’과 ‘고발’을 내세운 김남천은 이후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풍속론’과 ‘관찰 문학론’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더 확장한다.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에게 ‘모랄’이 필요하다면, 그 모랄이 다시 구체화되는 것은 ‘풍속, 습관’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양식에 기반해 제도화된 사회적 습관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길러진 인간의 사회적 감정 모두를 말한다. 고발과 모랄을 통한 주체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은 풍속으로 제시될 때 민중의 숨결이 스며든 역사와 실질적인 관련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발자크가 그랬던 것처럼 풍속의 재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관찰’을 제시한다. 이처럼 김남천은 사상이나 이론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만나면서 끝없이 갱신이 가능한 주체를 창작의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다. 그때 언제나 김남천의 창작 방법론 중심에 있던 것은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또 문예이론을 정립해 나가는 한편 실제 소설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200자평
김남천은 소설 창작과 평론 활동을 동시에 펼쳐 나간 작가였다. 그의 대표 평론을 남승원이 엮고 해설했다.
지은이
김남천(金南天, 1911. 3. 16∼?)은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김남천은 1911년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면 성원읍 하부리에서 태어났다. 성천 인근의 중농이자 군청 공무원이었던 김영전(김해 김씨)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효식(孝植)이었으나,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김남천은 자신의 집안이나 유년 시절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남한에 생존하고 있던 그의 형제나 일가친척들의 증언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해방 직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설립을 주도한다. 이후 김남천과 대립하던 카프계 문인들이 만든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라는 단체 역시 결성되는데, 이듬해 박헌영의 지시로 두 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고 김남천은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을 맡는다. 이와 더불어 다방면에 걸친 평론과 소설 역시 꾸준히 발표한다. 이후 미군정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이 심화되어 1947년 4월에 개최 예정이었던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가 불발되면서 좌익 문인들의 월북이 시작되는데, 김남천 역시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함께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 직후에는 해주에 있던 제일인쇄소를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이외에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북한 외부성에서 정보 업무를 다루거나 ‘문학예술총동맹’의 서기장 등을 지내는 등, 분단 직후 북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학 활동으로는 유일하게 1951년 단편 <꿀>(≪인민평론≫)을 발표했다.
북한 정권이 남로당 계열 문인들을 숙청할 때 김남천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발표했던 단편소설 <꿀>을 문제 삼아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생활 중 일시 석방되어 다시 고향인 성천으로 내려가게 되었으나, 1953년경 그곳에서 온가족이 즉결 처분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1955년 8월 즈음에 처형되었다는 설, 또는 카프 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김삼규에 의하면 1978년까지도 북한에서 생존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를 알 수는 없다.
엮은이
남승원(南勝元)은 경희대학교에서 <한국 근대시의 물신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서울신문≫으로 등단, 문학 계간지 ≪시인동네≫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현재 ≪포지션≫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차례
當面 課題의 認識
創作 過程에 關한 感想
批判 精神에의 待望과 論爭 過程의 重要性
告發의 精神과 作家
創作 方法의 新局面
純粹藝術 自己의 破産 외
‘유다’的인 것과 文學
自己 分裂의 超克
道德의 文學的 把握
一身上 眞理와 ‘모랄’
小說의 當面 課題
智識階級 典型의 創造와 <故鄕>主人公에 對한 感想
春園 李光洙 氏를 말함
批判하는 것과 合理化하는 것과
朝鮮的 長篇小說의 一考察
朝鮮 文學의 性格
世態와 風俗
해설
김남천은
엮은이 남승원은
책속으로
작자가 자기 자신을 구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개조를 철저하게 실현하기 위한 진실한 노력으로 창작적 실천을 유도하지 않는 이상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사회 시평의 복사로, 농촌문제는 언제나 농업 이론으로 그리고 연애는 언제나 연애 이론으로서밖에 제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는 작가의 창조적 호흡과 열의는 전연 영자(影子)를 감추어 버리고 말 것이다. 문제는 주체성에 있어서 제출되며 주체의 재건은 작가 자신의 철저한 자성(自省),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속에 있는 ‘유다’적인 것의 적발에서 가능하며, 이렇게 하여서 시행되는 작가의 자기 개조의 방향이 창작적 실천으로 유도될 때에 소시민 출신 작가의 최초의 ‘모랄’은 제기되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계급과 전 인류의 문제는 비로소 하나의 정당한 왜곡 없는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유다’적인 것과 문학-소시민 출신 작가의 최초 모랄>